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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번의 실패?: 결선 투표 대소동

[미국 헌법과 대통령 선거 시리즈 4편] 당파 싸움과 선거 소동 (1)

by 발태모의 포랍도

2020년 11월 3일, 미국 대통령 선거인단 투표가 모두 끝났고, 각 주별로 개표 작업이 한참 진행 중이다. 미국 동부 현지 시각으로 11월 4일 오후 2시, 아직 공식적인 승자는 발표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특별히 팬데믹 상황에서 선거를 치른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우편 투표, 부재자 투표, 사전 투표수가 많았고, 그에 따라 개표에도 시간이 더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4일 새벽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간단한 발표가 있었다. 바이든이 지지자들에게 자신감을 내비치며 개표가 끝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잘 지켜보자고 주문한데 반하여, 트럼프는 본인이 이미 사실상 승리했다며 더 이상의 개표를 중지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자신이 소송을 진행할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따라서 현재 바이든의 당선이 유력시됨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와 공화당이 경합주에서 재검표를 요구하거나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소송을 제기한다면, 이번 대선이 확실히 종료되기까지는 앞으로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미국 역사를 보면, 선거를 마무리 짓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된 경우가 제법 있었다. 낙선자로부터 무효라는 이의가 제기된 선거도 있었다. 위의 사진 속 한 남자는 시카고 트리뷴지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표지 헤드라인은 이렇게 말한다. "듀이(공화당 후보)가 트루먼(민주당 후보)을 이겼다!" 신문을 들고 있는 사람은 바로 해리 트루먼, 1948년 당시 대통령이자 민주당 후보였다. 이 사진은 그러니까 트루먼이 스스로의 당선을 확인한 직후, 자신의 낙선을 성급하게 보도한 희대의 오보를 재밌다는 듯이 소개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접전이 벌어졌던 역사 속의 대통령 선거 하나를 사례로 소개하며, 지난번에 다루지 못한 미국 대통령 선거제도의 특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지는 글에서도 역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논의를 계속하겠다.


앞선 시리즈 3편에서 우리는 연방 헌법의 입안자들이 어떠한 의도로 선거인단이라는 제도를 고안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실제로 선거인단의 역할이 어떻게 바뀌어버렸는지 살펴보았다. 핵심은 정당의 등장이었다. 정당이 후보자 선출부터 선거의 모든 과정을 주도하게 됨에 따라, 선거인들은 그저 정당이 지명한 후보에게 투표하는 요원들로 전락했다.


처음 이러한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1796년 대선 때였다. 이 때는 아직 전국 정당의 모습을 확실히 갖춘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연방주의당(The Federalist Party)과 민주-공화당(The Democratic-Republican Party) 간의 대립은 선명했다. 연방주의당의 후보는 당시 워싱턴 초대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을 하고 있었던 메사츄세츠 출신 존 애덤스였고, 민주-공화당의 후보는 버지니아 출신 토마스 제퍼슨이었다.


제퍼슨은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연맹 의회의 버지니아 주 대표 등을 역임한 대표적인 독립/건국 공신이었다. 영국과의 강화 조약을 맺은 직후, 제퍼슨은 애덤스, 벤자민 프랭클린과 함께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무역협정을 맺기 위한 외교 사절로 활약하기도 했었다. 그 후 프랭클린의 대사직을 물려받아 프랑스에 4년 간 더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그는 필라델피아 제헌의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자신의 뜻을 제임스 메디슨을 비롯한 지인들에게 편지로 전했을 뿐이다. 제퍼슨이 연방 헌법 입안자(The Framers) 중 한 명이 될 수 없었던 이유다.


새 연방 정부가 출범하자, 워싱턴 대통령은 제퍼슨을 초기 국무 장관으로 임명한다. 제퍼슨은 워싱턴이 꾸린 내각 내에서 부통령 애덤스와 재무 장관 알랙산더 해밀턴을 비롯한 연방주의자들과 국정 운영에 관한 이견으로 갈등을 겪는다. 연방 은행 설립을 두고 해밀턴과 제퍼슨이 대립각을 세운 것이 대표적이었다. 연방 헌법에는 은행 설립에 대한 조항이 없다. 제퍼슨은 연방 은행 설립이 헌법에 위배되는 일일뿐더러, 각 주의 법령과도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연방 정부가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헌법에 직접적으로 열거되어 있는 것으로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해밀턴을 비롯한 연방주의자들은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연방 정부의 권력 행사의 목적이 헌법의 조문과 정신에 합치한다는 전제하에서, 헌법이 "명시적"으로 부여한 수단뿐 아니라 "암시적"으로 부여한 것까지 능동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워싱턴 대통령은 해밀턴의 손을 들어줬고, 제퍼슨은 워싱턴 1기 행정부를 끝으로 장관직에서 물러 났다. 그리고 들어선 워싱턴 2기 행정부가 끝나갈 무렵, 1796년 대선이 있었던 것이다.

연방 헌법 2조 1항 중 일부를 다시 주목해 보자.


"선거인들은 각기 자기 주에서 회합하여 비밀 투표에 의하여 2 인을 지지하는 투표권을 행사하되, 그중 적어도 1인은 자기와 동일한 주의 주민이 아니어야 한다." (강조는 필자)


각 선거인은 두 명의 후보에게 투표하게 되어 있다. 그 두 명 중 한 명은 자신과 같은 주 출신이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투표하는 두 사람 중 누가 대통령 후보이고 누가 부통령 후보인지에 대한 정보도 기입하지 않는다. 헌법 입안자들의 의도는 이랬다. 선거인은 아무래도 같은 주 출신의 후보에게 우호적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모든 선거인이 대통령/부통령 구분 없이 2명을 선택하게 된다면, 가장 우수한 후보가 전국적으로 지지를 받을 확률이 높아지고, 각 지역 파벌의 통제력이 약화될 것이다.


1796년 대선 펜실베니아 주 선거인단 선거 | 출처: Michael Dubin, United States Elections, 1788-1860


문제는 지역 파벌이 아닌 정당에 의한 전국적인 당파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위의 표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1796년 대선 당시 두 거대 정당은 선거인단 선거를 대부분 장악했다. 펜실베니아의 경우는 일반 유권자 투표로 선거인을 선출했는데(각 주별 선거인단 선출방법의 차이는 시리즈 3편을 참조), 일반 유권자는 실제 선거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양 정당이 지명한 두 후보를 놓고 투표했다. 제퍼슨은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뒀고, 펜실베니아의 선거인은 제퍼슨의 당인 민주-공화당에서 임명한 사람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현재와 같은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선거인단은 더 이상 독립적인 기관이 아니다. 선거인은 각 주를 대표하고 중앙 정치에서 독립하여 스스로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대표자가 아니라, 정당이 임명한 후보에게 투표할 것을 약속하고 유권자가 자신이 속한 정당의 후보를 선택했을 경우에 그 선택을 확인하는 일종의 '요식행위'로서의 최종 투표를 수행하게 되는 그 정당의 요원에 불과한 것이다. 1796년 대선 결과는 애덤스의 승리였다. 그러나 차점자는 그의 러닝메이트였던 토마스 핀크니가 아니라, 민주-공화당 후보 제퍼슨이었다. 제퍼슨이 애덤스 정부의 부통령이 된 까닭이다.


1796년 선거가 미국 대선의 역사에서 정당 정치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다면, 1800년 선거는 당시 선거 제도가 초래할 수 있는 예기치 않은 위기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줬던 대표적인 사례였다.


미국 1-4대 대통령 선거 각 후보 득표 상황 | 표 작성: 필자


1800년 선거 당시 양 당 간의 당파 싸움은 더욱 극심해졌다. 연방주의당은 현직 대통령이었던 애덤스를 대통령 후보로, 찰스 핀크니를 그의 러닝메이트로 내세웠고, 민주-공화당은 당시 부통령이었던 제퍼슨을 대통령 후보로, 애런 버를 그의 러닝메이트로 추대했다. 치열한 당파 싸움 때문에 각 정당의 내부 결속이 거의 완벽했다. 선거인단 중 연방주의당에 속한 선거인들은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애덤스와 핀크니에게 표를 던졌고, 민주-공화당 선거인들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제퍼슨과 버에게 투표했다. 총 138명의 선거인이 두 표씩 투표한 결과는 제퍼슨 73표, 버 73표, 애덤스 65표, 핀크니 64표! 숫적으로 우세했던 민주-공화당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제퍼슨과 버의 득표수가 정확히 일치한 것이다! 민주-공화당은 승리를 거뒀으나, 선거는 끝나지 않았다. 민주-공화당 소속 선거인들은 분명히 제퍼슨을 대통령 후보로, 버를 부통령 후보로 간주하고 투표했지만, 투표용지 상에는 둘 간의 차이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 까닭에 사상 최초로 헌법이 정한 2라운드 결선 투표가 연방 하원에서 치러졌다.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서 2라운드 결선 투표가 처음 논의되었을 때, 첫 번째 안으로 상정되었던 것은 상원에서 투표로 당선자를 가리는 방법이었다. 매디슨해밀턴을 위시한 일군의 사람들이 즉각 반대에 나섰다. 당시 상원 의원은 유권자의 일반 투표가 아닌 각 주 의회의 결정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1913년 수정 헌법 17조에 의해 일반 유권자 투표로 개정되었다), 그들의 선택이 일반 유권자의 민의와 동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들은 대통령 선거 결과를 종국적으로 상원의 손에 맡기느니, 과반수 득표 규정을 없애서 누구든지 최다 득표자가 (과반수를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으로 당선되도록 하는 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 안은 두 번의 시도 끝에 모두 부결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커네티컷 대표였던 로저 셔먼이 결선 투표를 상원이 아닌 하원에서 열되 상원에서와 같이 각 주가 동등한 비중으로 투표하는 방법을 채택하도록 하는 일종의 타협안을 내놓으면서, 헌법 2조 1항의 제도가 최종적으로 만들어졌다.


1800/1801년 당시 미국에는 16개의 주가 있었다. 각 주별로 한 표씩 행사하게 되고 과반의 지지가 필요하니,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9표 이상을 얻어야 했다. 여기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각 주에서 한 표씩 투표를 해야 하는데, 각 주를 대표하는 하원 의원들끼리 의견이 맞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수결이 가장 상식적인 방식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한 주의 하원 의원 수가 짝수이고, 그들이 정확하게 반-반으로 갈라져서 서로 대립한다면 그 주에게 할당된 한 표는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는가? 실제로 메릴랜드와 버몬트에서 이러한 내부 갈등이 벌어져서 무효 처리되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가 넘는 최다 득표를 한 것은 민주-공화당 후보 제퍼슨과 버였는데, 당시 레임-덕 하원에는 여전히 연방주의당의 힘이 강했던 것이다. 연방주의당 소속 하원 의원들은 이 선거를 빨리 끝낼 아무런 동기가 없었다. 오히려 대통령 자리를 결석으로 만드는 것이 유리하기까지 했다. 이럴 경우 권력 공백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의 논의가 의회에서 벌어질 것이고 그럼 자신들의 영향력이 더욱 증대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파벌주의와 당파성이 의회를 지배했다.


첫 결선 투표 결과 제퍼슨은 8표 버는 6표를 얻었다.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1표가 부족했다. 연방주의자들이 의도적으로 버에게 표를 몰아준 탓이었다. 민주-공화당 사람들은 당연히 격분했고, 하원에서의 표결은 계속되었다. 결과는 모두 동일했다. 제퍼슨 8표, 버 6표! 무려 서른다섯 번을 투표에 부쳤으나 똑같은 상황만 반복되었다. 당시 민주-공화당 성향의 버지니아와 펜실베니아의 주지사는 만에 하나 있을 유혈 투쟁을 위해 군대를 보낼 채비를 하기도 했다.


혹자는 제퍼슨의 러닝메이트였던 버가 왜 후보직을 사퇴하지 않고 제퍼슨과 대적하여 연방주의자들의 방해공작에 힘을 실어 주었는지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그 역시 야심에 찬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뉴욕 출신의 버는 뉴욕 주 법무장관과 연방 상원의원을 역임한 인물로, 이미 1796년에 제퍼슨의 러닝메이트로 대선에 나섰다가 낙선한 바가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예상치 못한 하원에서의 2차 결선투표는 천우신조였다. 9명만 설득하면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버는 제퍼슨에 대한 연방주의당 하원 의원들의 반감을 이용하여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면, 연방주의당의 입장에서도 훨씬 좋을 것이라고 그들을 설득하면서 말이다. 서른다섯 번을 투표했음에도 결과가 계속 제자리걸음이었던 것은 결국 연방주의당의 당파적 이익과 버의 정치적 야심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이 대치 상황을 끝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제퍼슨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적수였던 연방주의당의 당수 격인 해밀턴이었다. 같은 뉴욕 출신의 해밀턴은 버의 행보를 맹비난했다. 제퍼슨에 대한 해밀턴의 반감이 정치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버에 대한 그의 마음은 인간적 혐오에 가까웠다. 해밀턴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반-반으로 갈라져서 무효처리가 되었던 메릴랜드와 버몬트가 제퍼슨에게 표를 던졌다. 결국 서른여섯 번째 하원 결선 투표에서 제퍼슨이 10표를 얻어 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 대소동을 겪은 뒤, 제퍼슨 정권 하에서 민주-공화당이 주축이 된 연방 의회 의원들은 대통령 선거제도 개혁에 돌입한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수정 헌법 12조였다. 1803년 9월에 의회를 통과한 수정 헌법안은 이듬해 6월에 비준 절차를 마치고 헌법에 포함되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알랙산더 해밀턴은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한다. 그를 쏜 상대는 바로 애런 버였다.


1804년 7월 11일, 해밀턴과 버의 결투. 총상을 당한 해밀턴은 다음날 사망했다. | 그림 출처: history.com



<미국 헌법과 대통령 선거 시리즈>

1편: 대통령 당선에 실패한 최다 득표자?

2편: 연방 헌법과 대통령의 탄생

3편: 대통령 선거인단이란 무엇인가?

4편: 35번의 실패?: 결선 투표 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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