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암환자가 되었다. 건강한 컨디션으로 즐거운 일상과 함께 가을 피크닉을 즐기던 어느 날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뜬금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내가 왜? 나는 아픈 곳이 없는데? 정말 아무 증상도 없었다. 밥도 잘 먹었고 평소 면역력이 약해서 잘 아프기는 했지만 암환자로 판정을 받던 그 시기는 아픈 곳도 없이 건강한 컨디션이었다. 엄마도 나에게 그랬다. 살이 갑자기 빠진 것도 아니고 밥 잘 먹고 살도 찌고 하니 별 일 아니겠지 생각했단다. 왜 보통은 갑자기 살이 빠지거나 갑자기 이상한 통증을 느끼거나 해서 병을 의심하는데 당시의 나는 앞서 말했듯이 일상을 잘 보내고 있었고 요가와 명상으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편안한 상태였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유방암 초기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다고 한다. 가슴에 혹이 만져지고 통증이나 몸에 이상이 느껴졌을 때는 이미 2기 이상으로 접어든 때라고 한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암진단은 국가 건강 검진에서 먼저 발견이 되었다. 여자 나이 40세부터는 위검사와 유방촬영 검사가 추가된다. 난생처음 해보는 유방 촬영 검사에서 미세 석회화가 발견되었고 3차 병원에서 정밀 검사로 확인해 두는 것이 좋겠다는 소견을 받았다. 나는 24살에 처음 손으로 1센티미터 정도의 혹이 만져져서 병원에 간 적이 있고 당시 하나인 줄 알았던 혹은 좌측에서만 6개가 발견되며 다발성 섬유선종 진단을 받고 크기가 큰 것들은 맘모톰 시술로 여러 차례 제거했던 이력이 있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초음파 검사와 조직검사로 검진을 했다. 섬유선종은 양성 종양이다. 좌측 유방에 24살 때부터 가지고 있는 섬유선종도 있고 당연히 유방 촬영에서 무엇인가 나오리라는 것은 예측을 했다. 오랫동안 유방 검진에 소홀했고 마흔이 되면서 몸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검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유방 촬영 소견에 무엇인가 나오면 분명 초음파 검진을 받으라고 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좌측 유방은 내게 오랫동안 골칫 덩어리이자 간혹 불안감을 주기는 했지만 매번 양성 종양이었으므로 그리고 그 후 16년을 아무 일 없이 지내 왔으므로 신경은 쓰이지만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유방 촬영 검사에서 나온 미세 석회화도 섬유선종처럼 그런 것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검진한 곳에서 진료 의뢰서와 유방 촬영 CD 복사본을 바로 챙겨 줘서 집으로 왔고 막상 병원에 검사받으러 갈 생각 하니 귀찮고 꺼려졌다. 가지고 있는 섬유선종을 맘모톰 시술로 제거하자는 말이 나올 것 같아 그랬던 것 같다. 맘모톰 시술은 너무 아프다. 그 시술 당일은 앞가슴이 찢겨 나간 것처럼 아프고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내가 겪은 오래전 맘모톰 시술은 그랬다. 그것을 4번을 했고 유두에 있는 작은 것은 가지고 있으면 위험하다고 해서 수술로 제거했다. 어차피 유방 외과에 진료를 한번 보러 가기로 했으니 그때 보면 되지 않을까 하며 마음속에서는 검사를 미루려고 했지만 그때 나의 예민한 촉이 발동했는지 빨리 검사하고 마음 편하게 있자 하며 빈센트 병원에 바로 예약을 했다. 보통 예약 잡으려면 2,3개월 걸리는 경우도 있는데 1주일 뒤로 예약이 빠르게 잡혔다.
담당 교수님은 나의 유방 촬영 CD 복사본을 확인하며 조직 검사를 할 건데 초음파 상에서 석회화 부분이 잘 보이지 않으면 수술을 해서 조직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갔던 나는 수술이란 말에 긴장이 되었다. 유방 촬영을 다시 했고 초음파 검사와 함께 총 조직 검사를 했다. 세침검사로만 조직 검사를 했었는데 총 조직검사는 마취를 하고 맘모톰처럼 피부를 조금 절개한 후 기구를 넣고 조직을 떼어갔다. 미세 석회화와 가지고 있던 섬유선종 2개까지 해서 총 3군데 조직을 떼었다. 다행히 수술이 아닌 초음파로 보며 조직 검사를 해서 안도감이 들었다. 검사를 끝내고 나오자 살짝 어지러우면서 긴장이 풀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좌측 유방은 내게 아픈 손가락 같은 건데 이 고생을 또 한다 생각하니 갑자기 서러웠던 것 같다.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 나의 휴무와 맞지 않아서 휴무에 맞추어 3주 뒤에 결과를 들으려고 했다가 이때도 뭔가 나의 예민한 촉이 발동했는지 휴무 일정을 바꾸고 10일 뒤에 결과를 듣기로 진료 예약을 잡았다. 그 10일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었으므로 초조하고 불안했다. 미세 석회화에 대해 검색을 했고 미세 석회화의 20프로는 암으로 판정된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도 80프로는 양성으로 나온다니까 이것도 섬유선종처럼 그렇게 나오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사이즈가 있는 섬유선종 2개를 제거하자고 하는 말이었고 그중 한 개는 이번에 새로 발견된 거라서 나는 그 혹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준비성이 강한 나는 그에 맞추어 대안을 생각해 두었다. 최악의 결과가 나올 경우 퇴사를 해야 했고 그 모든 것들이 양성으로 나올 경우와 제거를 해야 할 경우 휴가 조율을 해야 했다.
물론 이때까지도 나는 최악의 경우는 아주 희박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과가 잘 나오기만을 바라며 결과 보는 날 병원을 방문했는데 접수해 주시는 간호사 선생님께서 교수님이 면역조직검사를 하자고 했다며 수납을 한번 하고 오라고 했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검사로 그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간호사 선생님은 전에 떼어 두었던 조직으로 교수님이 판단했을 때 좀 애매한 부분을 더 정밀하게 검사하고자 하는 거라서 검사를 한다고 꼭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수납을 하고 와서 대기실에서 대기하는 동안 호흡을 가다듬고 명상을 했다. 괜찮을 거라고 나를 다독이고 다독였다. 하지만 계속 불안해지는 마음은 제대로 가라앉지 않았다. 그 불안감은 예감했던 것일까. 결국 진료실에서 담당 교수님께 들은 말은 “유방암 1기입니다”였다. 나는 내 귀로 듣고도 믿지 못할 그 말에 너무 놀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고 교수님은 그런 나를 보며 “빠르게 치료해 보도록 하죠”라고 하셨다.
교수님의 말씀대로 나의 치료는 아주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말로만 듣던 산정특례 중증 암환자로 등록되었고 2주 뒤로 수술 예약이 잡혔으며 치료와 검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서명했으며 수술을 위한 검사들을 했다. 놀란 내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해내갔고 다 끝난 후에야 병원 복도 대기실 의자에 홀로 앉아서 눈물을 흘렸다. 손과 몸이 떨렸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내가 암환자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곳에 앉아 가족과 직장에 나의 암소식을 전화로 전했다. 떨려오는 목소리와 수시로 흘러 떨어지려는 눈물을 애써 머금고는 "암이라고 진단이 돼서 퇴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직장에 전했다. 최악의 상황을 예측하기는 했지만 정말 내가 퇴사를 이렇게 바로 해야 하는 상황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암으로 말이다. 전화로 전해 듣는 이의 목소리도 떨렸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7년 가까이 다녔던 직장을 갑작스레 그만둔다는 통보와 나의 암이라는 말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게는 그 마음까지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처음으로 주변과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나만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죽음과 연결된 병 앞에서 순간 그렇게 되었고 그렇게 하는 게 맞았다. 나를 살리는 일 외에는 다른 그 무엇도 중요한 것은 없었다. 연락하고 지내는 지인에게 나의 놀란 마음을 알렸고 그다음으로 아빠와 통화를 했다. 이상하게도 좋은 소식은 가장 먼저 가족에게 전하고 싶은데 좋지 않은 소식은 제일 마지막으로 미루게 된다. 결과 어떻게 나왔냐고 묻는 아빠에게
"나.... 암 이래..."
"뭐?!"
"유방암 1기래... 나... 어떻게 해.."
하고는 그제야 놀란 마음을 오열하며 눈물로 쏟아냈다. 서럽고 서러웠다. 세상이 무너진 듯한 느낌. 실제로 나를 이룬 나의 세계가 한순간에 무너진 듯했다. 울고 있는 내게 아빠는 괜찮다며 1기이면 금방 좋아질 수 있는 거라고 다독였다. 아빠에게 소식을 들은 엄마가 전화해서 데리러 갈까 했지만 아니라고 했다. 검사를 마치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데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혼자 있고 싶었다. 어딘가로 증발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딱히 갈 곳이 없어서 집으로 향했다. 엄마가 나를 끌어안아주며 다독였다. 나는 그런 엄마 품에서 엉엉 울고 또 울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간에 현재를 잘 살아가기 위해 해 왔던 것들. 독서와 기록, 일기 쓰기, 감사일기, 긍정확언, 요가와 명상으로 단련해 왔던 나의 내면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많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2주 동안은 갑작스러운 퇴사 준비와 수술 준비 그리고 멘털을 바로 잡는 데에 시간을 바쁘게 보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쉽지는 않다. 맞이해야 하는 현실은 계속 참담하므로 그저 버티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였다. 한편에는 믿기 힘든 현실에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근심이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에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잘 이겨낼 거라고 다짐하며 이것을 나의 ‘터닝포인트’로 삼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헤쳐 나가겠다는 그리고 이것을 발판 삼아 새롭게 살아가겠다는 단단함이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고 내면의 힘이란 것을 느꼈다. 처음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당혹감과 생지옥 같았던 항암도 많이 고통스럽고 슬펐지만 다시금 일어서서 아프고 슬픈 날은 그런대로 살아가고 괜찮은 날에는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즐겁게 살려고 했다. 암환자이어도 즐겁게 사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암환자가 된 것은 이미 벌어진 일이고 그 사실은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선택은 할 수 있다. 암환자로 슬픔과 우울 속에 살 것인지 암환자이지만 즐겁게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갈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암환자로 평생 관리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전이 재발되면 어떻게 하지? 나 죽으면 어떻게 해..... 등등 암담하게 생각하며 슬퍼했던 시기는 내게 잠시 뿐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암환자로 살다가 죽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내 인생이 너무 아깝고 그런 마무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항암 2차와 3차 사이 항암 부작용이 너무 심해 급기야 백혈구 수치가 계속 떨어져서 일주일 내내 피검사를 하고 항생제와 호중구 수치 올리는 주사를 맞으러 다녔다. 주말에는 응급실로 가서 검사를 하고 수치에 따라 같은 처치를 하고 돌아왔다. 백혈구 수치가 주사를 맞고도 오르지 않고 계속 떨어져서 0까지 떨어졌다. 백혈구 수치가 낮으면 굉장히 피곤하고 몸에 기력이 없다. 몸에 병을 이겨낼 수 있는 방패막이 없으므로 폐렴이라도 오면 큰일 난다. 그런 힘든 몸을 이끌고 매일 병원을 가던 어느 날 피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2시간을 병원 대기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을 때였다. 그날은 유독 힘들었는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아프다가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하지? 내가 남기고 가는 것은 뭘까. 그리고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그 생각 끝에 허무함이 몰려왔다. 나는 아직 이 세상에 남긴 것이 없으며 금세 잊힐 것이란 생각과 내가 그토록 아끼고 모았던 돈도, 좋아하는 물건들도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수래공수거가 맞았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그때 했던 생각이 내게 큰 영향을 주고 생각의 전환을 가져왔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오래 살아갈지 알 수 없지만 내가 가진 것들로 세상에 선한 영향을 남기고 싶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죽어서도 내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나의 내면에 채워진 것들이란 생각을 했다. 내가 세상에 영향을 주고 가고 싶은 것과 내면에 채워진 것은 나의 영혼은 기억할 것이기 때문에 이 삶을 잘 살았구나 하며 후회 없는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에 내가 가진 것을 남긴다는 의미는 나의 내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내면에서 나온 것들로 남기고 싶고 나의 내면을 채우는 것들을 소유하고 싶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물질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도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내면을 채우는 것들에 더 관심을 두고 싶다. 그중에서도 나를 무해하게 하는 것들을 가까이하고 싶다. 어느 날, 나는 암환자가 되었지만 암환자로만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암은 내 삶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일부분의 일로 나의 삶을 낭비할 수 없으니 암치료와 건강관리는 최선을 다해 성실히 임하고 나의 삶은 삶대로 흘러가도록 하고 싶다. 내가 그토록 바라고 생각했던 현재를 잘 살아가는 것과 내게 무해한 것들을 채우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지향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이상하게도 암환자가 되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그런 바람들이 쉽게 다가왔다. 바꿀 수 없고 할 수 없는 것들에 목매지 않는다. 유방암으로 내가 잃은 것들을 구태여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한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이것이 유방암 환자로 살아가는 나의 삶의 방식이다.
아직까지도 나는 ‘천운’이었다고 말한다. 이만하면 천만다행인 거라고 다독인다. 모든 것이 운명이었고 순리였던 것처럼 지나갔다. 비록 치료 과정은 길고 고통스러웠지만 모든 부분에 있어서 운이 좋게 흘러갔다. 40세가 되어서 했던 첫 유방 촬영에서 조기 진단이 되었던 것과 정밀 검사를 미루지 않고 바로 예약했던 나의 선택이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그 뒤로 운이 좋게도 남들은 몇 개월씩 기다린다는 수술을 나는 진단 2주 만에 수술을 했다. 그만큼 모든 치료 시기가 더 앞당겨진 것이다. 암환자가 되었다는 것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운이 좋게 흘러갔다.
나는 현재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주어지는 매일에 감사한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암치료를 하면서 몸소 느꼈다. 암환자이지만 나는 매일의 오늘을 잘 살아갈 것이다. 암담하다 여겼던 먼 미래에 벌어지지 않을 혹은 벌어질 일이라 해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한다. 단단한 내면을 무기로 가진다면 나는 또 잘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