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소모하며 살지 않기

by 별하열음

암환자가 되기 전까지는 안정적인 직장을 선호했고 책임감과 생활력이 강한 나는 웬만하면 한 곳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직장 생활을 했다. 그만두고 싶은 슬럼프야 직장인이 겪는 거지만 늘 때마다 슬럼프를 느끼면서도 참고 잘 참으면서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유지해 왔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했고 대학을 가지 않고 이른 나이부터 일을 했다. 돈을 벌어서 생활에 보탬이 되어야 했고 나를 위해 쓰는 돈은 그만큼 현저히 적었다. 드라마 <그 해 여름은>에서 여주인공 국연수가 한 말 중에 친구를 사귀는 데에도 돈이 든다는 말을 나는 가장 공감했다. 돈이 없으면 누군가 만나자는 말을 거절하게 되고 자연히 무리에서 멀어지게 되며 자존심에도 생채기가 난다. 하고 싶은 꿈보다 돈을 버는 일을 우선순위에 놓아야 하고 삶의 대부분을 그 우선순위를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

가난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려고 했다. 열심히 살면 성공할 수 있는 줄 알았고 성공하고 싶었다. 그 성공이란 것은 늘 돈 때문에 위축되고 돈 때문에 불행했던 나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이 모든 것에 열심히, 성실히 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성실히 살았다. 암판정을 받기 직전까지도 나는 그랬다.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돈을 벌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책임져 주는 사람은 없다. 나는 K장녀이다. 부모님도 도와야 하고 나 자신도 책임져야 하는 K장녀. 희한하게도 장녀와 장남의 타이틀은 원래 그렇게 정해진 것인지 다들 비슷하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독립적이고 책임감 강하고 가난한 집이면 그 집의 짐을 자연히 짊어진다. 한때는 그것이 싫고 벗어나고 싶어서 ‘막내처럼 살래’를 입버릇처럼 하고 다닌 적이 있지만 K장녀의 뼈대는 어디 안 가더라. 모아둔 돈을 흥청망청 쓰지도 못하고 무엇 하나 좀 비싸면 저렴한 다른 것으로 눈을 돌렸다. 가난은 타인에게도 인색해지고 나에게도 인색해진다. 넉넉함이란 것을 몰라서 마음마저 나누어 줄 것이 없었다.

습관을 쉽게 고치기 어렵듯이 열심히 사는 것이 나에게는 습관 같은 거였다. 요령 피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는다. 실수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유연하게 최적주의자로 살려고 노력한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 B.I가 그랬다. 사람이 너무 단단하면 쉽게 부러진다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최선을 다 할 뿐이야 유연한 삶을 살 거야’라며 내가 나를 옥죄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마음속으로 곱씹는다. 최적주의자는 유연한 삶과 연관되어 있다. 20대의 나는 늘 목표를 부여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틀에 맞춰 달리도록 나를 몰아세웠다. 그리고 모든 일에 열심을 다했다. 일도 열심 스펙 쌓기 위한 공부도 열심. 그렇게 쫓기듯이 나를 몰아세우고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살았던 나는 열심히 했는데도 성과 없는 현실에 좌절하며 번아웃이란 걸 겪었다. 한참 후에야 책을 읽고 성찰했던 것은 그렇게 모든 것에 열심일 필요는 없었다는 것과 열심히 산다고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열심에도 선택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어쩌면 나란 사람의 성향이 열심히 성취감 있게 사는 것에 삶의 만족을 느끼는 사람일 수도 있다. 암환자로 살아가는 지금도 나는 하루를 성실히 성취감을 주며 살아가려고 한다. 열심과 성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열심과 성실을 쓸 것인가를 판단하고 선택했어야 한다는 거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 주변에서 인정은 받지만 그만큼 주어지는 일들이 많다. 직장에서의 아이러니는 열심과 성실에 대한 보상은 그저 인간적인 인정뿐이다라는 것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월급을 받는데 일 잘하는 직원에게 일이 더 많이 주어진다. 일을 잘하니 신뢰와 기대가 있고 일을 못하는 사람은 못 믿어서 그런지 맡기지 않는다. 나는 전자의 사람이다. 쓸데없는 오지랖과 열심히 일을 떠안은 것도 있고 일을 잘한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맡겨지는 일도 많았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일에 있어서 요령 피움 없이 해야 될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사회생활신조이다. 지금은 퇴사를 해서 백수 상태이지만 언젠가 또다시 직장 생활을 한다면 나는 또다시 열심히 책임감을 가지고 일할 것이다. 그래서 또 그렇게 무턱대고 열심히 나를 태우면서 일할 것 같아 암환자가 된 지금의 나는 이제 직장 생활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뜻을 정했다. 나를 소모시키며 살고 싶지 않고 나를 메마르게 하고 싶지도 않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모르는데 무엇인가를 희생하거나 책임져가며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충분히 그렇게 살아왔고 살아봤으니 이제는 달라진 인생 앞에서 삶을 대하는 태도 또한 바뀌어야 했다.

직장 생활을 하지 않고 나를 먹여 살릴 수완이 당장 있는 것은 아니다. 암환자가 되고 나는 내 삶에 많이 용감해졌다. 암환자가 되기 전이었다면 안정성을 추구하는 나는 직장에 소속되어 있는 것에 대한 안정감으로 살아가려고 했을 것이다. 암진단을 받고 초기에는 빨리 치료받고 원래 나의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생각, 언제부터 다시 취업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들을 했었는데 유방암 치료를 받으면서 핸디캡이 생긴 몸 상태는 예전처럼 일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이제는 달라진 나의 삶, 그 삶을 터닝포인트 삼아 재설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빠른 단념과 동시에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지금 나의 우선순위는 나를 건강하게 살게 하는 것이다. 무조건 건강이 1순위. 그러므로 나를 소모시키면서 스트레스받는 일과 관계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암 전문 박사님이 말씀하시길 암의 주요 원인은 스트레스라고 했다. 스트레스를 최소화해야 하는데 사실 직장은 스트레스와의 전쟁터 아니겠는가.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건드리는 사람들 때문에 "일이 힘든 건 참아도 사람 때문에 힘든 건 못 참는다"라는 말이 도는 것 아닐까.

예민한 감수성에 스트레스가 취약한 것도 한몫해서 무던하게 넘기지를 못했다. 무던하게 넘기고 싶다고 넘길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로써 깨달은 것은 ‘아, 나는 혼자 하는 일에 어울리는 사람이구나’였다. 사람 간의 관계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세계도 강한 나는 혼자 하는 일에 어울리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것을 이제야 새삼 느꼈다. 그간에는 안정적인 직장을 꾸준히 다녀야 하니 직장 생활로 오는 불편함과 괴로움을 원래 다 그런 거라며 어딜 가나 똑같다며 다독이고 다독여 참아내며 다녔다. 이제는 혼자 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뜻을 정한다. 직장이야 언제든 다시 다닐 수 있는 거고 나에게 프리랜서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래야 5년 동안 때마다 정기 검진도 편하게 받고 치료도 할 테니. 나에게는 유동적인 자유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나를 돌보고 챙기는 행위들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치료받을 시간, 운동할 시간, 삼시 세끼를 잘 챙겨 먹을 시간, 잠을 잘 잘 수 있는 시간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 결론적으로 앞으로 나는 프리랜서가 되거나 최소한의 시간과 노동을 들이며 할 수 있는 일을 찾거나 하는 선택지에 있다.


좀 불안정하고 프리랜서로 못 살면 어떠한가 그렇게 살아보다가 안되면 다시 직장 생활하는 거고 다 어떻게든 길은 열리게 되어 있다며 평소 답지 않은 생각들에 나 자신도 놀란다. 암환자가 됨과 동시에 삶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좀 못하면 어때 좀 실패하면 어때 한번뿐인 인생 경험은 해 볼 수 있는 거잖아 잠시 그렇게 산다고 해서 인생 크게 어떻게 되지 않아....' 등등 쫄보가 왜 그렇게 용감해진 것인지 뭔가 이제야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인생이 펼쳐질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내 나이 서른에는 번아웃, 마흔에는 암으로 인생에 큰 가르침과 함께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것 같다. 나는 꼭 이렇게 큰 일을 겪어내고서야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왜 그전에는 멈추지 못했을까. 인생에 ‘잠시 멈춤’이란 중요하다. 하루라는 시간 속에서도 멈춤은 필요하다. 나를 소모하면서 일하는 것은 결국 내게 유해한 것들이다. 나는 이제 꼭 필요한 것에 열심과 성실함으로 대하고 내가 소모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즉시 ‘잠시 멈춤’ 버튼도 누르며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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