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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내는 것'에서 '살고 싶은 것'으로 건너가는 중

by 살라

'살아내는 것'에서 '살고 싶은 것'으로 건너가는 데는, 얼마나 많은 아침이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밥상을 차려야 할까. 얼마나 많은 문장을 써야 할까.

그건 아마도, 세탁기가 멈추는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빨래가 끝났다는 신호음. 그 짧은 '띵' 소리 뒤에 찾아오는 고요. 젖은 옷가지들을 꺼내 털고, 구겨진 소매를 펴고, 하나씩 집게에 끼워 넘기는 동안—손끝에 닿는 면의 차가움, 물기의 무게, 섬유유연제의 미끄러운 감촉. 그것들이 전부 피부를 통해 들어와 '지금 여기'를 증명한다.

살아내는 것은 이를 악물고 하는 거다. 살고 싶은 것은 빨래를 너는 순간, 문득 햇살이 어깨를 만지고 지나갈 때 '아, 따뜻하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고양이는 그런 순간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모니터와 키보드 사이, 그 좁은 틈새에 얼굴을 들이밀고 나를 올려다본다. 호랑이 같은 줄무늬,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작은 몸, 그리고 저 진지한 눈빛. 마치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이. 아니, 어쩌면 저 녀석은 '일'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내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오간다는 것, 가끔 한숨을 쉰다는 것. 그것들만 알고 있을 뿐.


나는 문장을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다가 멈춘다. 화면을 바라보는 내 눈이 점점 무거워질 때쯤, 고양이가 모니터 옆으로 살금살금 다가온다. 흰 양말을 신은 것처럼 작은 앞발이 키보드 모서리에 닿는다. 그러고는 그대로, 내 팔과 책상 사이 그 비좁은 공간에 몸을 밀어 넣는다.


이상한 건, 저 녀석이 거기 있으면 글이 써진다는 것.
아니, 정확히는 글을 쓰고 싶어 진다는 것. '해야 해'가 아니라 '하고 싶어'가 되는 것. 고양이의 체온이 내 팔목을 데우고, 가끔 골골거리는 소리가 작은 진동으로 전해져 온다. 그 온기와 떨림이 키보드를 타고 흘러, 문장이 된다.

어젯밤 편의점에서 본 여자아이는, 컵라면 두 개를 들고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김치찌개 맛과 짜장 맛. 형광등 불빛 아래 그 아이의 표정은 지나치게 진지했다. 어쩌면 그건 그날의 유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삶이 버거울 때,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렇게 작아진다. 하지만 그 작은 선택을 고민하는 동안, 우리는 적어도 '고르는 사람'이 된다. 끌려가지 않는다.

살아내던 사람이 살고 싶어지는 건, 그러니까—

아침 해가 커튼 틈으로 새어들 때, 눈을 뜨고 '5분만 더'가 아니라 '일어나 볼까' 하고 생각하는 날.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또 이것밖에 없네'가 아니라 '이걸로 뭘 만들어볼까' 하고 손이 움직이는 날.
버스 창밖으로 지나가는 가로수를 보며, 죽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보다, 저 나무들이 올해는 언제쯤 꽃을 피울까 궁금해지는 날.

그러니까 답은, '얼마나 많은'이 아니라 '어느 순간'인 것 같다.

수백 번의 아침이 지나가도 바뀌지 않을 수 있고, 단 한 번의 밥상에서 모든 게 달라질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 이 문장을 쓰는 동안, 나는 이미 건너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 끝이 간지럽고, 창밖에서 까치가 울고, 커피가 식어가는 이 순간을 나는 느끼고 있으니까.

살아내는 것에서 살고 싶은 것으로 건너가는 데 필요한 건, 많은 게 아니라 '충분한' 것이다. 충분히 작은 것들을 충분히 오래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 충분히 느릴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충분히 작은 것에 감동할 수 있는, 아직 굳지 않은 마음 한 귀퉁이.

오늘 내가 쓴 문장이 누군가의 '어느 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손가락 끝이 조금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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