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사랑
우리는 모두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길고양이에게 추르를 건네고, 절뚝거리는 강아지를 발견하면 동물보호소를 검색한다. 누군가의 불행을 듣고 나면 "힘내"라는 말과 함께 하트 이모티콘을 보낸다. 우리는 모두 선량하다. 책임지기 전까지만.
연민과 동정은 착해 보이는 자신의 만족이다. 지나가다 보이는 길고양이에게 츄르를 주는 건, 고양이를 위해서가 아니다. 따뜻해 보이는 자신을 보며 만족하기 때문이다. 함께 뛰어들 용기는 없지만 착한 사람이라는 감상에는 취할 수 있다. 고양이는 환영한다. 지나가다 츄르를 먹은 고양이는 얼마나 행운인가. 그렇게 매일 지나가며 츄르를 먹으면 길들여진다. 사랑 없는 길들임이 얼마나 잔인한지도 모른 채.
사랑한다는 말이 이렇게 쉬워진 적이 있었을까. 별도 달도 따주겠다던 손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동정이 앞선 사랑은 하찮다. 그 손은 상대의 손톱 밑 때를 발견하는 순간 다정한 눈을 거둬들인다. 불면증, 우울의 이야기가 나오면 피곤해한다. 투정 한 줄의 글도 보기 불편하다 함부로 말한다.
동정은 달콤하다. 처음엔.
연민은 숭고해 보인다. 처음엔.
하지만 동정과 연민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불쌍한 대상이 대등한 위치로 올라오는 순간, 달콤함은 부담이 된다.
이 시대 우리는 사랑의 낭만만 구경하고 싶어 한다. 발레 관람권을 샀지, 망나니칼춤의 파트너가 되려던 건 아니었으니까.
망나니칼춤을 아는가.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이 복수를 시작할 때, 주여정은 함께 칼을 들었다. 동은이 "왕자가 아닌 칼춤 춰줄 망나니가 필요"하다고 하자, 여기에 보기만 해도 고통이 느껴지는 사랑하는 여자의 짙은 흉터를 목격한 그는 "할게요 망나니. 칼춤 출게요."라고 말하며 함께 뛰어들었다.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상대의 분노에 함께 춤추고, 상대의 폐허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 함께 무너질 각오. 비장하게도 나는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
너의 분노와 모욕 앞에서, 나는 함께 칼춤을 췄다. 부끄러운 줄 알면서 너보다 더 격렬하게 분노했다. 너의 화를 내 안에 묻혀 덜어내고 싶었기에. 나는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러니 당연히 너도 내 분노에 함께 춰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 말이 없다."며 회피했다. 외면했다.
그제야 알았다. 너는 관객이었다는 것을. 무대 위에서 함께 춤추는 파트너가 아니라, 객석에 앉아 박수만 치던 관람객이었다는 것을. 너는 내가 네 춤에 맞춰주길 원했을 뿐, 내 춤에 맞춰줄 생각은 없었다는 것을. 동정이 앞선 사랑은 하찮다. 불쌍한 대상이 투정을 부리기 시작하면, 본인이 착한 사람이라는 감상은 깨진다.
신경숙 작가는 썼다. "인간의 폐허야말로 한 인간의 정체성이며, 사랑하는 자만이 상대의 폐허를 들여다본다"고. "그 폐허를 엿본 대가는 얼마나 큰가. 무턱대고 함께 있어야 하거나, 보호자가 되어야 하거나, 때로는 치유해줘야 하거나 함께 죽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 시대의 사랑은 폐허의 관람객이다. 절반은 보았지만 끝까지는 보지 않았다고 관람의 대가는 지불하지 않는다.
첫 번째 균열을 구경하고, 사진 한 장 찍고, 두 번째 무너짐이 시작되면 출구를 찾는다.
그러니 묻는다. 폐허를 들여다볼 용기가 있는가. 함께 무너질 각오가 있는가. 함께 뛰어들 용기가 있는가.
없다면, 지나가라. 호기심으로, 동정으로, 연민으로, 순간의 감상으로 남의 폐허에 발을 들이지 마라. 함께 춰달라고 손 내밀지 마라. 어차피 너의 춤에만 맞춰달라 할 거면서. 동정으로 시작할 거면 아예 시작하지 마라. 함께 뛰어들 용기는 없다면 지나가라.
길고양이는 집으로 들어왔다. 추르가 매일 나오고, 따뜻한 이불이 있고, 쓰다듬는 손이 있었다. 책임을 고민하지 않고 "불쌍해서 데려왔어"라던 그 손이 처음엔 다정했다. 골목의 추위를 잊었다. 하악질 하던 법을 잊었다. 야생성을 잃었다. 사랑을 배웠다. 의존을 배웠다. 집사의 발소리에 꼬리를 흔드는 법을 배웠다.
그러다 어느 날, 문이 열렸다. 털에서 냄새가 난다고, 불쌍해서 데려왔던 고양이가 이제 짐이 되었다고. 착한 사람이라는 감상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고. 운명이라던 인연은 하찮다.
고양이는 다시 골목으로 간다. 하지만 이제 고양이는 골목을 모른다. 추위에 떠는 법을 잊었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법을 잊었고, 다른 고양이들의 영역 싸움에 끼어들 수도 없다. 사랑을 알아버린 몸으로 사랑 없는 세계를 걸어야 한다. 길들임은 이렇게 잔인하다. 처음부터 길들여지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야 하는데, 몸은 이미 따뜻한 이불을 기억한다. 손은 이미 쓰다듬는 감촉을 기억한다. 입은 이미 추르의 맛을 기억한다.
동정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사랑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너무 늦게 배운다.
생텍쥐페리는 썼다.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영원히 책임이 있다"고. 아, 그건 우주 어딘가, B612 행성에나 있는 이야기였구나. 지구에는 없는 이야기였구나.
우리는 모두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다만, 책임지기 전까지만. 그 이후는 길들여진 것들이 알아서 살아남아야 할 문제니까. 망나니칼춤은 드라마 속에서만 있고, 현실은 혼자 추는 거니까. 폐허는 혼자 걷는 거니까.
이제 고양이는 처음부터 길들여지지 않았던 것처럼 골목을 걷는다. 하악질 하는 법을 다시 배운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법을 다시 배운다. 얼어붙는 법을 다시 배운다. 구걸하는 표정은 얼굴에서 지운다. 망나니칼춤을 함께 출 사람이 없으면 혼자 춘다. 폐허는 원래 혼자 걷는 곳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