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겪는 타인의 고난을 들여다보는 건 얼마나 무거운 일인가.
과거 겪었던 고난에 대한 타인의 이야기는 얼마나 가벼운 일인가.
"지금 힘들어."
누군가 지금 우는 얼굴, 괴로운 얼굴이 말을 한다.
그 말 뒤에 붙는 마침표의 무게. 문장이 끝나지 않는다. 공기가 지금 내 어깨가 무겁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온몸이 무겁다.
"그때 정말 힘들었어."
과거형이 붙으면 문장은 가벼워진다. 이미 지나간 시간. 이미 마른 눈물. 그 얼룩으로 빨래를 몇 번 돌렸을까. 세제 냄새가 날까, 섬유유연제 냄새는 날까. 그 눈물을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
"근데 지나고 나니까."
과거는 서사가 된다. 기승전결이 있다. 끝이 있다. 살아남은 사람만이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다. 안도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끝이 있다는 것에.
현재진행형의 고통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어떡하지."
라고 묻는 사람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조언은 섣부르고, 위로는 공허하고, 침묵은 냉정하다. 내 존재자체가 무례해진다. 멀쩡한 내 얼굴이, 마른 내 눈이, 가벼운 내 어깨가.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다. 이미 건넌 다리. 이미 내린 산. 이미 빠져나온 터널. 우리는 끝을 아는 이야기를 선호한다. 그래야 박수를 칠 수 있고, 감탄할 수 있고, 교훈을 얻을 수 있어서일까
어제 친구가 전화했다.
"엄마가 아파."
나는 받는 내내 무거웠다. 그 무게는 현재형 문장의 무게였다. 나는 말을 찾았지만 찾아지지 않았다. 빈 말만 입 안에서 맴돌았다.
"... 많이?"
어리석은 질문. 아픔에 많고 적음이 어디 있나.
그래서 SNS는 과거형으로 가득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결국엔."
그들은 생존자가 되어 글을 쓴다. 끝을 아는 사람들의 담담함. 현재진행형의 고통은 게시되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무게를 들 수 없는 사람에게 무게를 건넬 수 없으니까.
친한 동생에게 안부전화가 왔다.
"지금 괜찮아?"
"응, 그럼"
동생은 안도했고 더 묻지 않는다.
지금의 괜찮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묻지 않는다. 나는 감히 무게를 나눌 자신이 없다.
그저 지금을 삼킨다.
타인의 고난을 듣는 일.
그것의 무게는 시제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는 이야기가 되고, 현재는 무게가 된다. 우리는 이야기는 들을 수 있지만, 무게는 감히 함께 들 수 없다. 그래서 과거의 고난에는 박수를 보내고, 현재의 고난 앞에서는 말을 잃는다.
현재형은 답할 수 없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현재를 과거처럼 쓴다. 미래의 내가 돼서.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결국엔 잘 되었어."
사진은 며칠 전 끝난 티빙 드라마, [친애하는 X ]의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