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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라 Oct 17. 2024

슬픔에 책임있는 것들에게

슬픔에 책임있는 것들에게


숨고 싶어서, 피하고 싶어서 굴을 팠다
땅속으로 파 내려가다 보니,
무덤이었다
내가 누울까 하다
혼자 눕기엔 넓고 깊었다

슬픔에 책임있는 것들을
하나씩 불러다 묻을 만큼이다

슬픔에 책임있는 것들

엄마 얼굴도 알 수 없게 도망간 엄마,
그 빈자리에 아이를 성폭행한 아빠,
엄마의 죽음을 웃으며 말하고
알콜 중독으로 죽어버린 새엄마,
이미 무게에 짓눌려 굴 속에 들어간 아이에게
얹힌 새엄마의 사고뭉치 아들,
버려진 아이를 성폭행한 큰아빠,
화풀이 욕받이로 손녀를 키운 할머니,
폭풍우로 거친 그늘을 만든 그,
멈추지 않는 피로 멍을 만들어
감추고 싶은 슬픔을 드러내고야 마는
끊임없이 괴롭힌 병

이젠 부를까 하다
이젠 묻을까 하다

힘들게 판 내 굴을 자세히 보니
그릇이었다.

내 그릇
아주 넓고 깊은 그릇

사과나무 씨를 심어
우주도 담을 나의 그릇

이제까지 난
내 그릇을 만들었던 것

슬픔에 책임있는 것들은
이미 내 사과나무의 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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