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소녀

첫 눈 내린 날

by 이순미

11월에 눈이 내린다. 11월에 눈이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11월의 첫눈치고는 너무 많이 내린다. 갑자기 습격을 당한듯이 마을이 하얗게 변해 버린다. 창문을 여니 집앞의 잔디밭이 하얗고 나무 가지들마다 하얀 옷을 입었다. 나이들어 가면서 이렇게 눈이 내린 날은 위험을 느끼며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창밖으로 멀리 치악산 풍경을 바라보고 그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능 걸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삶이 어디 그런가. 외출을 하고 싶다. 10시 반에 약속을 잡았다. 이런 날은 오후쯤에 약속을 잡아도 되련만 이른 약속이 부담스럽긴하다.


모자를 쓰고 장갑까지는 아니지만 두꺼운 패딩을 입고 신발장에서 신발장에서 겨을 신발을 찾아내어 신고 집을 나섰다. 3층에서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열고보니 생각보다 눈이 많이 내린다. 집앞의 자그마한 화단과 화분에 소복하게 눈이 쌓여있. 예쁘네. 소복소복이라는 그 어여쁜 단어가 잘 어울리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발걸음이 느려진다. 집앞에 서 있는 나뭇가지에 눈을 주니 빨갛게 던풍든 나무들이 아직 잎을 떨구지 않았는데 그 위에 하얀눈이 소복히 쌓여있다. 철이 없는지 철을 모르는지 서너송이 핀 빨간 장미도 하얀 모자를 쓰고 있다. 작은 나뭇가지 가지마다 소복소복 올려져 있는 수채화 영상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옆의 공원으로 향한다. 이런날, 공원이 참 예쁘겠구나.



우리마을에 박경리문학공원이 있다. 남들은 여행처럼 시간내서 들리는 곳이지만, 나는 시시때때로 마치 우리집 정원 드나들듯이 다니는 곳이다. 이렇게 예쁜 날 그곳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서둘러 공원을 기웃거린다. 낮은 담장 위의 하얀 눈송이들 너머 공원의 정원을 넘겨다보면서 공원 옆의 전봇대 길을 걸으며 사진을 찍는다.



이거 어쩌나? 이러다가 약속 시간 늦겠네. 마음은 급하지만 이 설경을 그냥 지나칠 수도 없어서 내친김에 담장 옆을 지나 공원 안으로 들어간다. 박경리 선생님이 사시던 얫집 앞의 산수유 나무를 바라보니 빨간 열매가 맺힌 나무에 눈이 가득하다. 아무도 없는 너른 마당, 선생님의 동상이 외로워 보인다. 적적함이 깃들지만 이렇게 눈이 내린 예쁜 정원이 있어 감사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 둔다.


아차, 내가 이러면 안되지. 이렇게 눈이 내려서 교통이 불편한 날인데 이런날 오전 약속을 위해 나왔을 사람을 위해 서둘러 공원을 나온다. 약속 시간은 아직 늦지 않았다. 공원 옆을 지나 약속한 그녀에게로 가는길이다. 차도 옆의 좁은 인도 양옆으로 나무들이 죽 이여쟈 있는데 눈을 맞으며 그 사잇길을 걷는다. 햐, 너무 이쁜 길이잖아.


문득, 나를 생각한다. 이제는 눈이 내리면 미끄러운 교통을 생각하고 넘어질까봐 외출을 삼가고, 눈이 녹는 뒤의 지져분함이 먼저 떠 오르곤 했다. 아이들이 출퇴근 길을 걱정하고 가족의 운전길을 염려하고 손자손녀의 유치원 등교길을 걱정하곤했는데, 첫눈 내리는 날의 나는 왜 이렇게 소녀가 되어있나?


내안이 소녀. 삶과 생활에 지쳐 일상속의 날씨 하나에도 손익을 따져보며 불편함과 편함을 먼저 생각했었는데, 첫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지금의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 눈 앞에 보이는 풍경에 흥분해서 사진을 찍으면서 보이는 나뭇잎 하나, 나뭇가지 하나의 모습에 열중하다니. 내 안에, 그래 내 가슴에 아직은 계산 없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이어가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거지? 일상에 지치고 건강하지 못한 몸에 지친 생활 속에서 내 안의 소녀가 어쩌면 이런 날을 기다리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약속 장소로 가면서 현실로 돌아온다. 그러면서 내안의 소녀가 아직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이제부터 현실의 생활인으로 돌아와 미끄런 교통을 걱정하고 이상기온으로 변해가는 지구의 날씨와 삶에 대한 생각이 나기 시작하지만, 아직도 내 안에 어여쁜 소녀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도 잊지 말도록 하자.


머리 위의 흰 눈을 털며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흰머릿카락을 감추려 염색을 하기 위해 약속한 시간에 도착했다. 원장에 반갑게 웃는다. 앞에 손님이 있다. 눈 내리는 날이라 아침 손님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혼자의 생각이었다. 어쩌면, 첫눈과 더 놀다와도 되지 않았을까?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내 안의 소녀가 흰눈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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