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도둑
직장을 다니는 딸이 집에 내려왔다.
오랜 기간 기족의 보호 아래서 살다가 이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성장해서 직장에 다니고 있는 딸이다. 아침 일곱 시도되기 전에 작은 자취방에서 나와 낯선 이들이 모여 있는 사무실로 출근했다가 저녁이면 다시 작은 방으로 돌아와 혼자 밥을 먹고 잠이 들 딸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생활하고 그것이 사회 속에서 홀로서기를 하며 성장하는 한 과정이지만 엄마 된 마음으로 바라보는 딸의 모습이 안쓰럽다.
아, 좋다를 외치며 딸이 옥수수가 먹고 싶단다. 옥수수가 먹고 싶다니. 옥수수는 요즘의 젊은 아이들이 자주 찾는 간식은 아니다. 그런데도 아이가 옥수수를 찾는다. 70년대 농촌에서 자란 내가 추억을 따라가며 아이와 함께 자주 먹었던 옥수수가 이제는 딸이 느끼는 고향의 맛이 되었나 보다.
아침에 일어나니 커다란 자루에 옥수수가 가득 담겨 있다. 어디서 온 것인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껍질을 벗겼다. 밭에서 금방 딴 것을 커다란 가마솥에 소금이나 설탕도 넣지 않고 도중에 뚜껑도 열어보지 말고 불과 물의 힘으로 푹 삶아 낸 옥수수가 가장 맛있다. 지금은 가마솥이나 장작불은 없지만 싱싱한 옥수수에 만족하며 커다란 들통에 넣고 옥수수를 삶았다. 아이와 함께 앉아 탱탱하게 살이 올라 쫄깃 거리는 옥수수를 먹었다.
재잘거리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개의 옥수수를 먹고 나니 아침 운동 나갔던 남편이 들어왔다. 함께 앉아 배를 두둑하게 채웠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옥수수가 어디서 가져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늦은 시간이 되어야 잠이 들어 늦잠을 자는 나와는 다르게 남편은 새벽에 일어나 조기축구를 하는 사람이다. 때로는 농민들이 직거래를 하는 새벽시장에 나가 채소들을 사 오기도 한다. 새벽시장에는 물론 옥수수도 팔고 있다. 딸 사랑이 지극한 남편이니 새벽시장에 다녀오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것이다. 새벽시장에서 사 왔느냐고 물었다.
"이거 어머니 밭에서 가져온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남편이 말했다. 어머니 밭이라니. 그렇다면 이 옥수수는 친정어머니의 텃밭에서 따 왔다는 이야기다. 엄마를 만나보았느냐고 물으니 남편은 이른 새벽이라 주무시는 것 같아 말하지 못하고 그냥 따 왔다고 했다. 어머니가 봄에 씨를 뿌려 여름내 잘 가꾸고 있는 옥수수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커다란 자루에 담아 가지고 왔고, 나와 딸은 그런 옥수수를 친정어머니에게 감사의 말도 전하지 못하고 먹었던 것이다.
남편과 함께 친정에 갔다. 친정어머니는 밤 새 누군가가 옥수수를 따 갔다고 이제는 개를 담장 밖의 텃밭에 매 놓아야겠다고 말씀하신다. 잘 여문 옥수수가 지금쯤 가장 맛있을 것 같아 나에게 가져가라고 전화하려 했는데 그 하룻밤 사이에 도둑이 와서 옥수수를 가져갔으니 너무나 속이 상한다는 푸념이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사실을 고백했다.
간밤의 범인이 사위임을 알고 어머니의 말씀이 변했다. 잘했다고 했다. 옥수수가 너무 익으면 딱딱하게 여물어서 쪄 먹었을 때 맛이 없어지는데 아주 딱 맞추어서 옥수수를 땄으니 참 잘했다는 것이다. 모처럼 집에 내려온 손녀딸에게 맛있는 옥수수를 먹였으니 어머니의 마음은 아주 즐겁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 키운 옥수수였다는 것이다. 먹는 입이 예쁜 자식들을 위해 지은 농사이니 앞으로도 언제든지 잘 여문 옥수수는 말하지 않고 따 가라는 당부까지 하신다.
어느 해 여름인가. 삼겹살을 사서 친정에 갔다. 친정집은 길갓집이고 울타리 밖을 쭈욱 돌아가는 텃밭에는 많은 채소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날 어머니와 아버지는 계시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텃밭에서 싱싱한 상추를 솎았다. 그 상추와 삼겹살을 가지고 계곡으로 놀러 갔다. 시원한 그늘에 앉아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삼겹살을 구워서 상추에 싸 먹었다. 시원한 하루가 금방 흘러갔다.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오니 친정아버지가 집으로 전화를 하셨다. 잘 지내느냐고, 여름철 건강에 주의하면서 이 아들 잘 키우라는 전화였다. 이런저런 말끝에 아버지는, 길갓집이라 집에 도둑이 든다는 것이다. 낮에 친정에 갔을 때 비어 있었던 집을 생각하며 잃어버린 물건이 있느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낮에 잠깐 집을 비운 사이, 아버지가 우리들 주려고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가꾼 상추를 누가 뜯어 갔다는 것이다. 나는 크게 웃으면서 그 상추 우리 가족이 솎아왔다고 했다. 낮에 계곡에 놀러 가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고 했다.
아버지도 크게 웃으셨다. 잘했다고 했다.
“나쁜 도둑이 왔다 간 줄 알았더니 아주 이쁜 도둑이 왔다 갔구나. 이쁜 도둑은 자꾸 와도 좋아.”
라고 말씀 하셨다. 잘 키운 텃밭의 채소와 곡식이 도둑을 맞아도 즐거워하시던 아버지였다. 고향집의 텃밭에 앉아 어머니에게 즐거움을 주는 옥수수 밭을 바라보면서 지금은 계시지 않은 아버지를 떠올려 보았다.
딸은 평생 도둑이라는 옛 말이 있다.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고 공경해야 한다고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효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아직도 나는 옛말처럼 이렇게 어머니의 텃밭을 기웃거리고 산다. 나이가 많아 허리까지 굽고 작아진 몸으로 일구는 텃밭의 곡식을 내 딸이 먹고 싶다는 이유로 서리를 하고 마는 것이다. 나도 이제는 엄마가 되었기에 내 노력으로 딸과 친정어머니를 돌봐야 하지만 오히려 할머니가 된 어머니의 텃밭이 나를 위해 가꾸어지고 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호도를 잘하는 착하고 예쁜 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을 위한 농사로 어머니의 한평생이 흘러갔다.
남편의 시선이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 시간. 지금은 계시지 않은 아버지가 오래전에 내게 하시던 “이쁜 도둑” 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날이다.
예쁜도둑이라하셨지만, 먹는 입이 예뻐서 행복하다고 하셨지만, 나는 평생도둑으로 살아왔었는데 이제는 빚을 갚을 기회마져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예전에는 어머니가, 지금은 동생이 있는 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