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김상욱, <과학공부>
제목이 과학 공부인데 과학 얘기는 거의 없고, 그냥 일상 생활 잡담이 대부분이다. 여기에서 멈추면 좋았겠지만, 대화 주제로 삼으면 곤란한 2개 중 하나인 정치 이야기가 출몰한다. 그래서 독자 평점이 좋지 않다.
나의 경우, 정치 얘기는 별 상관 없는데, <과학 공부>라는 제목의 책에서 신변잡기 얘기만 만나는 건 좀 그랬다. 그래, 책 거의 끝까지 가기 전까지 그랬다. 그러다가 문득 '자유의지의 물리학'이라는 글을 만났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자유의지는 설 자리가 없어졌다
물리학은 자유의지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이다. 하지만 자유의지가 없다면 양자역학의 완결성에 의심이 생길 수 있다는 최근 연구 결과는 상황을 다소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물리학자가 자유의지를 버리기는 쉬워도 양자역학을 버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38쪽)
이미 뉴턴의 등장으로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방어하기 대단히 어려워졌다. 그러나 뉴턴이 누구인가? 그가 가장 많은 글을 쓴 주제는 신학이다. 뉴턴이 문제가 아니라, 종교가 권력의 최상층부에 위치한 시대가 문제다. 그래서 세계를 창조한 다음에 구석에 찌그러져 구경만 하는 아주 매력 넘치는 신 개념이 등장했다. 소위 <시계공> 신이다. 물론, 이 시계공은 나중에 도킨스에게 아주 된통 당하게 될 운명이다.
라플라스는 결정론을 마치 신처럼 모셨지만, 곧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카오스 이론이다. 계산 방법은 아는데, 계산이 너무 복잡해서 미래를 예측 못 하는 것이다. 무한 소수가 존재하는 판국에 정확한 계산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 무한 소수들은 대개 아아아주 중요한 수들이다.
그런데 판이 또 한번 바뀐다. 폴 디랙의 양자역학이다. 우주의 기본 구조 자체가 비결정론적인데, 결정론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양자역학적이지 않잖아? 뉴턴 역학으로 다 되잖아? 아니, 양자역학적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컴퓨터부터가 양자역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물건이다.
그래서 뭐 어떻다는 말인가?
현대 물리학이 보는 자유의지
앞 절에서는 과학의 발전 순서를 따라가 봤다. 이번에는 현재 과학 수준에서 자유의지라는 게 가능한지 생각해 보자.
우주가 결정론적인지에 따라 결정론과 비결정론으로 나눌 수 있고, 각각에 대해서 자유의지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결정론을 지지하는 경우, 모든 것이 다 결정되어 있으므로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하면 ‘강성 결정론’이 되고, 그럼에도 자유의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양립론’이 된다. 비결정론을 지지하는 경우, 결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면 ‘자유론’이 되고, 그럼에도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하면 ‘양립불능론’이 된다. (229쪽)
이름이 중요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이름이 있어야 부를 수 있다. 보는 바와 같이 2*2 매트릭스로 4가지 의견이 가능하다. 현재의 과학이 내려야 하는 결론은 강성 결정론에 가깝다. 물리학이, 아니 세상이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강성 결정론이다. 그 규칙의 핵심 중 하나인 양자역학이 모호한 것은, 규칙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우리, 즉 인간 인식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양자역학이 미시적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은, 거시적 세계에서 사는 우리가 결정론적 세계관을 지지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 물리학의 결론을 모두 수용한 상태에서 강성 결정론과 다른 것을 주장하는 것은 적어도 논리적이지는 않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 등장한다.
양자역학이 비결정론적이라고 해서 곧바로 자유의지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인간의 의식에 초점을 두고 자유의지를 생각한다면, 의식에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적 측면이 기여하는 바가 있는지 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저 펜로즈는 『우주, 양자, 마음The Large, the Small and the Human Mind』에서 양자역학의 중첩이 신경세포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제안을 했다. (233쪽)
로저 펜로즈가 주장하는, 소위 <조화 객관 환원 이론>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 뇌세포의 작동 방식에 양자역학적 중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것은 맞지만, 그는 이 이론이 아니라 블랙홀 연구에 대한 공적으로 그 상을 받았다. 노벨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리처드 파인먼이 훌륭한 봉고 연주자가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노벨상을 받았다 한들 로저 펜로즈의 생각은 그저 재미있는 생각일 뿐이다.
자유의지 대 양자역학
이 책에서 가장 놀랐던 것은 아래의 한 줄이다.
이 역설들의 해결은 간단하다.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을 포기하는 것이다. (235쪽)
EPR에 관한 이야기다. EPR에 대해서는 양자적 중첩에 의한 '얽힘' 현상이 실존한다는 것이 벨의 부등식 증명으로 이미 확인되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그냥 양자역학을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다! 바로 이런 상상력의 자유가 현대 물리학의 진정한 강점이다. 그걸 잊고 있었다니, 나도 참 한심하다.
이 문장은 그저 멋있으려고 지어낸 문장이 아니다. 벨의 부등식을 증명한 알랭 아스페는 결국 우주가 국소적 실재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셈인데, 이는 국소성이나 실재성 둘 중 적어도 하나가 우리 우주에서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벨의 부등식을 얻기 위한 가정에 빠진 것이 한 가지 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진다. 실험자가 원하는 물리량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의 색깔을 측정할지 공의 크기를 측정할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벨은 이것이 너무 당연하여 가정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다. 최근 물리학자들은 이 가정을 ‘측정독립measurement independence’이라는 용어로 부른다. 우주가 국소적 실재성을 갖더라도 측정독립 가정을 깨뜨리면 알랭 아스페의 실험 결과를 설명할 수 있다. (237쪽)
즉, 자유의지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알랭 아스페의 실험 결과가 설명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우주에 국소성과 실재성이 다 있다 해도,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EPR은 패러독스가 아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2011년 로저 콜벡Roger Colbeck과 레나토 레너Renato Renner는 교묘한 방법으로 양자역학이 완벽함을 증명한다. 우선 양자역학을 확장시킨 더 진보된 이론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그런 이론에서 얻어지는 추가적인 정보가 양자역학이 주는 정보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증명에서 저자들이 단 하나의 가정을 했다는 점이다. 바로 앞서 말한 측정독립성이다. 자유의지의 유무가 양자역학의 완결성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만약 실험자가 자유롭게 실험장치를 선택할 자유를 가지지 못한다면 양자역학이 불완전할 여지가 생긴다. (237쪽)
긴 얘기를 억지로 줄여보면, 자유의지가 없다면 양자역학도 없다는 얘기다.
지금까지 인류가 고생하며 쌓아온 과학은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두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다. 그런데 자유의지가 없다면 양자역학이 불완전할 수 있다. 양자역학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데, 자유의지가 없다면 양자역학이 무너질 수 있는 역설적 상황이다. (양자역학은 끝까지 역설을 좋아하는 듯.)
과학(물리학)은 철학이 던져온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왔다. 그래서 이제 자유의지의 문제도 철학이 아닌 과학의 문제가 되었다. 대체 자유의지란 것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