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으로 갓생 살기 - 루틴 (1) 루틴이 습관이다
칸트 내지 클라콘
지금 내 삶을 <삼체>의 지자가 감시한다면 지구에 사는 인류는 클라콘(Klackon) 같은 군집 동물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기상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에 오차가 별로 없고, 아침에 일어나면 물 한 잔 마시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와서 체중 재고 곧바로 운동을 시작한다. 집에 도착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의 패턴도 매일 거의 똑같다. 주말에는 패턴이 없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주말에는 주말 패턴이 있을 뿐이다. 물론 친구들을 만난다든가, 병원에 가야 한다든가 하면 패턴이 조금 깨지기는 한다. 그래도 큰 그림은 대체로 유지된다. 청소는 언제나 카페 가기 전에 하고, 베이킹은 카페에서 돌아와서 한다.
인생 너무 재미없는 것 아니냐고?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임마누엘 칸트라는 양반, 인생 참 피곤하고 재미없게 살았다고, 내 마음대로 판단했다. 팀 페리스는 <타이탄의 도구들>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루틴을 가지고 있더라고 말했다. 나는 물론 팀 페리스 기준으로 절대 성공한 사람이 아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 그러나 주관적인 기준에서 내 삶의 만족도는 지금이 가장 높다.
습관 만들기, 그나마 루틴이 가장 쉽다
습관이라는 것을 제대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5년쯤 전에 스티븐 기즈의 <습관의 재발견>을 읽고 나서다. 내게 가장 오래된 습관이라면 어떻게든 일주일에 운동을 세 번은 하자는 마음가짐인데, 이건 순전히 아토피라는 친구와 함께 살아보려는 발버둥이었을 뿐, 절대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습관이라는 것은 만들기도 어렵고, 유지하기는 더 어렵다. 독하게 목표를 잡아야 그 절반이라도 이루게 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성선설과 성악설이 대립하고 있지만, 게으름이 이들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진화 과학적으로 확실하다. 연초에는 언제나 매일 운동한다는 목표를 세우지만, 연말에 계산해 보면 운동을 빼먹은 날이 3%도 5%도 아니고 대강 10% 정도 된다. 거의 빼먹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역시 인간이란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기억만 간직하는 모양이다.
습관에 관련된 책들도 참 많다. 습관이 형성되는 데 21일이 걸리네, 49일이 걸리네 하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떠돌아다닌다. 저 숫자들이 정말이라 해도 그 숫자가 나에게도 적용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루틴이 40개쯤 되는 내 경험에 비춰보면, 얼마 동안 유지하면 자동 장착이 되는 그런 습관이란 없다. 어제까지 해왔듯이 오늘도 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해야 할 일을 빼먹었을 때 마음속을 스며드는 자책감이야말로 습관을 습관으로 정착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자기 효능감이라는 우울증 백신
우울증이라는 병은 사람에게서 모든 의욕을 앗아간다.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상황에 뭘 하고 싶을까. 이 질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기본적인 일상생활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그게 되지 않으면, 위생 상태가 열악해지고, 그래서 사람을 피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위생 상태를 개선할 이유가 없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루틴이 있는 사람은 어떤 끔찍한 상황에 빠져도 일상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
루틴은 또한 자기 효능감을 느끼게 해준다. 언젠가부터 모든 사람이 갖춰야 할 필수템으로 자리 잡은 자존감을 키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즉각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자기 효능감이다. (나는 이안 로버트슨이 <뉴 컨피던스>에서 주장하듯, 개개인을 위해서나 사회 전체를 위해서나 자존감보다는 자신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효능감은 간단히 말해 내가 쓸모가 있다는 느낌이다. 뭔가를 해내고,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 확인 가능할 때 생긴다. 베이킹을 하면 빵이 생기고,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긴다. 아무런 결과물이 남지 않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할 일 목록에서 그 일에 체크 표시를 하는 일은 눈으로 확인되는 현실의 실체다.
체중을 쟀다면 기록하자. 양치질을 하더라도 할 일 목록에 체크 표시를 할 수 있다. 무슨 부작용이 있을지 알지도 못하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제를 몸 안에 밀어 넣는 대신 아무런 부작용이 없는 체크 표시가 우울증에 맞서 싸우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자기 몸으로 임상 시험을 해볼 생각이라면, 생리의학 실험보다는 심리학 내지 행동경제학 실험을 먼저 해보자. 부작용의 위험이 현저히 낮다.
루틴이 습관이다
루틴 목록이 있으면 새로운 습관을 더하거나, 더는 필요 없는 일상 과제를 없애는 것도 간편해진다. 루틴 목록에 항목을 더하고 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 목록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된다. 새롭게 뭔가를 알게 되거나 해보고 싶은 것이 생기면 목록에 새 항목을 추가한다. 시도해 보니 나와는 맞지 않는 항목이 있다면 빼면 된다. 중요한 것은 체크 표시가 가능한 목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습관을 만들자는 추상적 선언보다는 루틴을 만들자는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계획을 마련하는 편이 좋다. 루틴을 계속하면 습관이고, 습관은 그 사람 자체다. 우리는 실제로 행한 일을 근거로 사람을 판단하지 그가 하겠다고 생각만 한 일로 그를 판단하지 않는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변신>하는 방법은 없다. 그렇게 변신하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확실한 자유의지의 존재 증명이다.
행동이 자동화된 것은 당신의 뇌가 갖가지 행동을 개시하는 각기 다른 예측을 하도록 스스로 세부조정하고 가지치키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당신은 당신 자신과 당신 주변의 세상을 다르게 경험하게 된다. 그거서은 자유의지의 한 형태다. (리사 펠드먼 배럿,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152쪽, 제4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