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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n 30. 2019

6월 29일, 아침


주말에는 알람을 꺼둔다. 충분히 잔 건지, 더 자야 하는지 망설이면서 알렉사에게 시간을 물어보니 7시 26분이란다. 아마 여기에 온 이후로 가장 빠른 속도로 침대에서 일어난 것 같다. 아무리 주말이래도 7시 26분은 좀 너무하지 않은가.



어제 생산성 좋은 시간을 보냈던 버지 유니언 빌딩에서 오늘도 보내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버지 유니언 빌딩처럼 좋은 건물은 늦게 오픈하고 일찍 닫는다는 것이다. 어제도 5시에 쫓겨나지 않았던가. 그래서 빌딩이 여는 10시까지는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기숙사 내 방에서 시간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단 가방을 챙겨 방에서 나왔다. 맨날 들고나오는 걸 깜빡하는 쓰레기봉투도 잊지 않고 챙겨 나와서 기숙사 바깥의 대형 쓰레기통에 넣었다. 8시가 갓 넘은 시간, 구름에 해가 가려있기는 해도 열기는 이미 공기를 꽉 채우고 있다. 망할 수증기 입자들 덕분이다.



어디를 가야 하나? 버지 유니언 빌딩 바로 옆 화학과 건물이 열려 있다면 최고지만 그럴 리는 없고, 가면서 문을 열어보고 다 닫혀 있는 최악의 경우에는 토요일 아침에 열려 있는 걸 이미 확인한 캔자스 유니언 빌딩으로 가면 된다. 물론 캔자스 유니언 빌딩까지 가려면 35분 정도 가야 하니, 그건 정말 최악이다. 하지만 바깥에서 찜 요리가 되는 것보다는 낫다.



근처에 건물도 나무도 없는 주차장 위쪽 길을 지나 화학과 건물에 다다른다. 문이 열려 있을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예상했던 바다. 버지 유니언 빌딩이 10시부터 여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지만, 바로 옆 건물이니 문을 한 번 당겨본다. 역시 꿈쩍도 안 한다. 땡볕을 받으며 공사 현장을 지나 걸어간다. 다음 타깃은 공대 건물들이다. 그런데 사실 공대 건물들이 닫혀 있는 건 지난주에도 확인했다. 그런데도 거기까지 가서 문을 또 당겨보는 건 조금 꺼려진다. 그래서 공대 쪽을 향해 걷다가 옆쪽 길로 샌다. 여기에도 건물들이 많으니 열리는 건물도 있지 않을까? 사실 그건 그저 자신에게 던져주는 구실일 뿐, 이왕 캔자스 유니언 빌딩으로 간다면 공대 건물 쪽 경사로를 올라가느니 그저 대각선으로 조금씩 경사를 올라가려는 것이 본심이다.



그런데 웬걸, 지난번에 길을 잘못 들어 알게 됐던 분수대 옆 음미대 건물 문이 열린다! 안은 어두컴컴하지만 적어도 냉방은 가동 중이다. 겨우 15분 정도 걸었을 뿐인데 34도가 예정된 햇살을 받아서 그런지 에어컨 공기가 너무너무 반갑다. 음미대 건물의 동쪽 문으로 들어갔지만 강의실만 즐비하고 앉아 있을 곳도 없다. 조명도 죄다 꺼져 있고. 그래서 분수대를 가로질러 서쪽 문을 열어본다. 이쪽도 문이 열린다. 저쪽과는 달리 소파가 많다. 알고 보니 극장으로 쓰는 건물이다. 박스 오피스도 있고. 그러다 보니 관람객들을 위한 소파라든가 앉아 있을 자리가 많다. 조명도 약하게는 켜져 있다. 앉을 자리가 수십 개는 되는데 이 건물에 나 혼자다. 테이블도 있고 큰 창가에 자리한 자리에 앉는다. 컴퓨터도 켜고. 그리고 집에 전화를 잠깐 한다. 한국은 이제 잘 시간이다. 카톡 페이스톡을 켜자 잠옷을 입은 아내가 화면에 나타난다. 잘 자. 사랑해.



음미대 건물, 정확하게 말하면 극장 건물 대합실에서 시간을 좀 보낸다. 9시 55분. 자리에서 일어선다. 냉방 공기에 한 시간 넘게 있었더니 햇살이 따뜻하다. 버지 유니언 빌딩까지 가는 시간 동안 머룬 5의 '슈거'를 듣는다. 이런 햇살에 어울리는 곡이다.



10시 3분. 버지 유니언 빌딩 문을 열고 들어선다. 정면으로 보이는 커피 판매대에는 이미 알바 총각이 나와 있다. 어차피 이 큰 건물에 우리 두 사람이다. 멀리서부터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커피 기계는 지금 작동 가능한가요, 아님 조금 시간이 필요한가요? 준비됐습니다. 그럼 라테 한 잔 부탁할게요.



학교 카페의 라테를 마시고 배탈이 난 게 도합 다섯 번은 된다. 커피는 무조건 최대 사이즈로 시키는 버릇 때문에 처음부터 제일 큰 사이즈로 시켰다가 고생을 제대로 했다. 그래서 내 평생 거의 마신 적도 없는 아메리카노를 몇 주 동안 마셨다. 그런데 얼마 전에 배도 고프고 해서 라테를 작은 잔으로 마셔보았다. 그랬더니, 역시나 또 배탈이 났다. 내가 원래 유당불내증이 있나 보다. 한국 우유에 한창 적응한 위가 미국 우유에 아직 적응을 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지, 그렇다면 저 맛있고 절대 배탈이 안 나는 PT's Coffee에서 파는 라테는 뭔데?



어쨌든, 400불이나 들어 있는 학교 계좌의 사이버 머니를 어디에다 쓴단 말인가? 아메리카노는 아무래도 입에 안 맞는다. 그냥 카페인 보충 차원에서 먹는 거지, 아메리카노를 마시느니 그냥 녹차를 마시겠다. 아메리카노로 400불을 쓰기도 어렵다. 하루에 네 잔 정도씩은 마셔줘야, 이곳을 뜨기 전에 사이버 머니를 소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학교 라테에 내 몸을 적응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 배탈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주에 계속해서 라테를 시켜 먹었다. 금요일에는 드디어 배탈이 나지 않고 라테 두 잔을 마시는 경지에 이르렀다. 인체의 신비란.



라테 가격을 계산하려던 알바 총각이 말한다. 캐셔가 작동하지 않네요.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This one is on the house!)"



아, 내가 저 표현을 죽기 전에 듣긴 듣는구나. 실제로 들어보니 참 감미롭다. 고맙다고 말하고, 서로 좋은 하루 되라고 덕담을 나눈 뒤에, 나는 건물 내 골목을 돌아 평소에 눈여겨 보아둔 가장 좋은 자리에 앉는다. 청소 담당 알바가 바퀴 달린 쓰레기통 두 개를 밀며 지나간다. 나는 먼저 인사한다. 이어폰을 꽂아 내 말이 제대로 들렸는지는 모르지만, 내 입 모양을 읽었는지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답한다.



"좋은 아침!"



2019년 6월 29일 토요일, 아침 10시 42분. 캔자스 주 로렌스, 캔자스 대학교, 버지 유니언 빌딩, 포럼 C/D 출입문 바로 옆 널찍한 공간에 혼자 앉아 이 글을 쓴다. 좋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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