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를 외면했던 나
살면서 야스퍼스나 키에르케고르, 심지어 스피노자라는 이름을 외면하고 살기는 수월한 편이다. 그러나 니체라는 이름은 그렇지 않다. 워낙 팬이 많아서다. 재미없는 책의 사례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들었다가 맹렬한 반대에 부딪힌 적이 있다.
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재미없었다. <선과 악을 너머>는 그것보다는 좀 나았으나 마찬가지였다. 두 책을 읽은 시간 간격이 20년이 넘는데도 그랬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글쓴 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보자. 니체는 경구(아포리즘)로 글을 쓴다. 내가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거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주장하는 바가 '선명한 진리'에 관한 것이라 경구임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불명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경구의 문제점은 의미가 불명확하다는 점이다.
이는 경구가 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축약된 표현이니 모호한 부분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 이 부분을 얼마나 아름답게 채워넣느냐에 따라 경구의 가치가 달라진다.
니체가 내게 와닿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라면 역시 초인 사상이다. 그냥 이름만 봐도 분명히 알 수 있듯, 초인 개념은 위험하다. 차별과 배제를 부르는 용어다. 니체 사상이 나치즘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냥 현실외면이거나 지나친 팬심일 뿐이다.
니체를 받아들이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쇼펜하워다. 니체 사상이 쇼펜하워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니체가 자신의 사상을 따라 산 반면, 쇼펜하워는 자기가 주장하는 것과 정확히 반대의 삶을 살다 죽었다. 근거 없는 이야기로 신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며 자신은 호의호식하는, 전형적인 사이비교주의 모습이었다.
니체에게 이끌려온 나
나는 니체를 점차 받아들였다. 어떻게 된 일일까?
니체를 내게 데려온 공의 절반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몫이다. 이 책은 니체 철학 입문이라 해도 좋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니체 철학을 <당의정>의 형태로 배웠다. 니체 철학이 어떻게 삶에 투영되는지는 물론, 니체 철학의 기본적 개념들에 대해서도 가르쳐준다. 니체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보여준다.
나머지 절반은 삶이 괴로워서다. 삶이 고통스러워지니, 내가 제일 좋아하던 철학 분야인 인식론이 한갓 말장난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이데거가 보여주듯, 인식론은 결국 존재론으로 연결된다. 그럼에도 하이데거에게 내가 끌렸던 것은 그의 철학이 가진 인식론적 기초다.
삶이 고통으로 가득해지자, 정확한 방법론 따위에 쓸 에너지는 없었다. 그저 지금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누가 한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랬다.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른 철학자가 니체였다.
영원회귀
앞서 말했 듯,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니체 철학을 배웠다. 영원회귀도 마찬가지다.
영원회귀의 개념, 그리고 그 의미는 명확하다. 내가 지금 하는 선택은 무한히 반복될 영원의 것이다. 따라서 사소한 선택도, 미뤄도 되는 선택도 없다. 모든 선택의 무게가 무한대가 된다. 즉 영원회귀란 말은 허투루 살지 말라 내지 막 살지 말라는 경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 개념 자체도 믿어야 할까? 니체는 이 개념을 정말 믿었을까? 우선 떠오르는 생각은 믿지 않았을 것 같다는 것이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아주 좋은 발명품이기는 하나, 영원회귀라는 개념의 액면을 믿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믿지 않는 동시에 믿지 않지도 않았을 것 같다.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만들어 던지기만 했을 뿐, 그게 정말일까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얘기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영원회귀로 시작하기는 해도, 영원회귀는 니체 철학의 핵심개념이라 할 수는 없다.
물론 이것도 해석 나름이다. 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접근이 대단히 효과적이라고 본다. 이 작품은 영원회귀가 수미쌍관으로 제시되는 소설이다. 영원회귀가 진실인 경우에만 이 소설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결론적으로, 니체에게 영원회귀가 진실일까 하는 문제는 부차적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법륜 스님에게 전통적 윤회관이 아주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