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은 끝나면 현실이 시작된다
밀라노에 도착했을 때부터였을까.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다가왔다. 여행이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나가는 데에서 느껴지는 안도감. 그리고 허니문이라는 환상이 이제 끝나고 현실로 돌아가야 된다는 사실이 주는 압박감. 이런 복잡한 감정들이 밀라노 여행 중간중간에 밀려왔지만 그래도 아직 나는 이탈리아에 있으니까라는 생각으로 올라오는 감정들을 통제해왔다. 그러나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 도착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를 때부터는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제대로 실감이 났다. 아내에게 내색은 안 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나는 앞으로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할 시간이야 충분히 많았으니까. 당장 출근을 하는 것이 싫은 기분이 드는 것도 큰 요인이었지만 결혼생활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있었다. 결혼식 전에는 결혼식 자체만을 생각했고, 신혼여행 때는 여행을 무사히 마치는 것만을 생각했다면 이제야 비로소 현실에서의 결혼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차례였던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고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결혼을 한 것이지만 내가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 것인가는 다른 문제이니까. 이전 세대들처럼 가장 혼자 가정을 이끌어가는 가부장제의 모습은 우리 세대에서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내가 배우자로서 아내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방식이든 서로에게 연결되어있으므로. 20대 시절에는 연애를 할 때에도 남자인 내가 많은 것들을 잘할 수 있어야 하며 상대방을 보호하고 둘의 관계를 리드해야 된다는 전통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가치관에 맞는 이상적인 남성의 모습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실제의 나는 돌발상황에 약하고 쉽게 상처 받으며 난관에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었다. 순간순간은 다른 사람처럼 연기를 할 수 있을지언정 평생을 연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아내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은 아내는 내 본연의 모습을 좋아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본인의 입맛에 맞게 나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아내의 모습 그 자체가 좋았다. 서로가 서로의 허술한 면은 놀리고 때로는 유치하고 치사할 수 있는 말들도 상대가 나를 오해할 걱정 없이,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의 관계였던 것이다.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하던 대로 하자.'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가 덧대어진다 한들 우리의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집안에서 따뜻하고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으면 족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말과 행동에서 사랑이 깃드는 것이니까. 여행이 계속되는 동안 내가 아내에게 조금 더 좋은 곳을 보여주고 싶고 더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어 했던 것처럼. 아내가 내가 마음껏 관광지와 맛있는 음식의 사진을 찍고 사색에 잠길 수 있게 배려해주었던 것처럼. 우리는 서로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하고 감동하며 현실에서도 잘 살아갈 것이다. 삶도 결혼생활도 여행의 연장선일 뿐이니.
코로나 시대의 신혼
신혼여행이 끝나고 1년 뒤에 1주년 여행을 떠나자던 우리의 계획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으로 인하여 무기한 연기되었다. 일상에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외출 전 옷을 갖춰 입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일이 되었고 주말에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자유로움이 박탈된 이 상황이 아쉽지만 주변에 아픈 사람이 없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집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일상에서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새로운 요리를 해서 맛을 보기도 하고 태블릿 PC로 영화나 드라마도 함께 보며 시간을 보낸다. 가끔 하나둘씩 살림살이를 늘려가는 것도 신혼의 재미이다. 최근에는 토스트 기를 구매했는데 점심 도시락으로 토스트에 다양한 잼과 햄, 치즈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재미에 푹 빠졌다. 코로나 시대에도 우리는 우리의 신혼을 행복하게 가꾸어 갈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프고 슬픈 시절이 제발 끝나기를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