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야로슬라블

러시아 기차 여행

by 넙죽

가을 장거리 기차 여행


짧은 여름을 지나 러시아가 어느새 가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 가을 또한 곧 지나가리란 것을 알기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가을의 감성을 듬뿍 마음에 받아들이기 위해 아내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우리의 여행은 보통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부터 시작되었지만 이번 여행은 목적지에서의 일정 보다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이 더 중요한 여행이었다. 그것은 이번 여행이 서정 충만한 기차여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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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대한 로망은 있었지만 그것에 걸맞는 체력과 인내심을 갖추지 못한 우리 부부는 약식으로나마 장거리 기차여행을 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네시간 반 정도로 걸리는 곳을 목적지로 삼았다. 바로 황금고리 끝자락에 위치한 도시 야로슬라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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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슬라블로 가기 위해 야로슬라브스키역으로 향한다. 러시아에서는 큰 역을 바그잘(вокзал)이라고 부르는데 야로슬라브스키도 그러한 바그잘 중 하나였다. 서울에 있는 역을 서울역이라고 부르는 한국과는 달리 러시아는 주목적지의 이름을 역에 붙이는 경우가 많다. 모스크바에서 야로슬라블로 향하는 기차를 타는 역은 야로슬라브스키 바그잘, 카잔으로 향하는 기차 타는 곳은 카잔스키 바그잘이다. 그래서 모스크바에는 키예브스키, 벨라루스키 바그잘 등 여러 지명이 붙은 역 이름이 많다. 고로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역이 없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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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칸에 오르니 승무원이 우리를 맞는다. 장거리 열차의 승무원은 단순 검표 업무 외에 승객들에게 전반적인 도움을 주는 일종의 엄마 같은 존재다. 청소부터 간단한 스낵 판매 등등 한시도 쉬지 않는 것 같다.


아무래도 누워서 가는 열차다 보니 자리 배정 및 이부자리를 까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몸이 나보다 가볍고 날렵한 아내가 2층 자리를, 후덕한 몸뚱아리를 가진 나는 1층 자리를 차지했다. 나의 덩치로 2층 자리를 차지했다가는 1층 자리의 아내는 가는 내내 붕괴의 공포에 시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내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발판을 타고 올라 2층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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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배치가 끝났으니 다음은 이부자리를 깔아야 한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에 빠졌다. 매트라던가 침구는 제공되었는데 그 모습이 육군훈련소 시절을 떠올리게 해 약간의 PTSD가 올 뻔 했다. 마치 관심병사가 된 기분으로 멍 때리고 서 있었는데 옆 좌석의 러시아 승객들이 적극적으로 챙겨주셨다. 젊은 여성 승객들은 영어로 열심히 방법을 설명해주었고 중년 여성분들은 직접 시범을 보여주셨다. 러시아분들의 관심과 애정으로 우리는 무사히 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야 르블유 라씨야!(я люблю Россия), 나는 러시아가 좋아요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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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가니 4시간 반이라는 반나절에 가까운 시간도 금방 지나갔다. 중간에 인터넷이 되지 않는 구간도 많았지만 창밖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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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도착한 야로슬라블은 오래된 고도답게 멋진 정교회 성당과 수도원들이 있었다. 야로슬라블 중심에 있는 수도원 탑에서 내려본 도시 전경은 고소공포증을 감수하고도 올라갈 만 한 가치가 있었다. 다만 전망대 바닥이 단순한 나무 바닥이었기 때문에 공포심이 생겨서 황급히 내려와야 했지만. 한발 한발 디딜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가 추락의 공포를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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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슬라블도 다른 러시아 도시들처럼 볼가강을 끼고 형성된 도시였기 때문에 볼가강 주변에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공원 전체에 흐르는 퀸의 명곡 'Somebody to love'가 사람들의 흥을 돋운다. 역시 흥의 민족 러시아인들.



아내에게 볼가강을 가서 볼까? 라고 툭 던졌다가 비웃음만 샀다. 아재개그는 노화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다급히 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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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가강을 본 후 딱히 큰 목적의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우리는 오래된 도시를 걸으며 가을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꼭 어디를 가면 유명한 곳은 다가봐야 돼!라는 마음에서 이제는 나에게 의미 있는 곳이나 울림을 주는 곳 위주로 방문하게 된다. 이번 여행에서는 기차 여행에서의 설렘과 야로슬라블의 상징인 곰돌이들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모스크바의 날


야로슬라블 여행을 떠난 9월 두번째 주간은 모스크바의 날이다. 도시의 건설을 기념하는 날로 2021년인 올해는 무려 도시가 건설된 지 874년이 되는 해다. 그 때문에 도시 곳곳에 모스크바의 날을 기리는 설치물들이 놓여있었다.


모스크바에 거주한 지 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어느덧 여행자가 아닌 주민으로서 도시를 사랑하게 된다. 다시 한국이 아닌 외국의 도시에서 살아보고 그 도시를 애정할 수 있을까?


지금 현재 모스크바에 살 수 있는 것도 매우 큰 행운이지만 말이다. 미래의 일은 미스테리이고 그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마음껏 이 도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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