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문을 연 여왕
아들로 태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해 결혼했지만 자신이 태어나고 아들을 낳지 못한 죄로 아버지의 명령으로 목이 잘렸다. 아버지가 왕좌에 있을 때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그래도 명색이 공주였으니까. 아니 남동생인 에드워드가 왕위에 올랐을 때까지도 나았다. 에드워드 마저 죽고 언니인 메리가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런던탑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언니인 메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데에 대한 원한을 동생에게 쏟은 셈이다.
누구의 이야기일까? 우리가 잘 아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이야기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차가운 런던탑에서 때를 기다렸다. 때가 되고 언니인 메리가 죽자 마침내 그녀가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의 고생은 끝나는 듯 보였으나 그녀의 난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레드카펫이 깔린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줄 알았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다. 영국의 여왕이라는 자리는 그녀가 생존을 위해 움켜쥐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영국 국민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무거운 자리였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여왕임에도 남자 못지않은 강단이 있었고 영국 국민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영국과 결혼한 듯 평생 처녀로 산 이 여왕의 목표는 영국을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왕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바다로 눈을 돌렸다.
엘리자베스 1세 재위 당시 바다의 패자는 스페인이었다. 일찍이 콜럼버스를 앞세워 아메리카 대륙을 개척한 스페인은 그 땅의 부를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다. 영국은 그런 스페인의 황금시대에 정면으로 도전할 자신이 없었으나 그들의 부를 나누어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길은 바로 해적을 가장해 그들의 상선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한참 해적질로 재미를 보던 영국의 꼬리가 너무 길었던지 스페인은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영국에 코 앞인 칼레에 전진 배치했다. 영국으로서는 엄청난 위기였으나 그들은 그들이 자랑하는 유능한 제독이자 해적인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내세워 배포 있게 맞섰다. 바다의 패권을 둔 큰 싸움. 그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영국이었다. 그 이후 오랫동안 영국은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다.
영국이 스페인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우수한 성능의 대포 덕분이다. 당시의 해전은 백병전 위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백병전이란 상대의 배 갑판에 갈고리를 던져 자신들의 배와 붙이거나 사다리를 이용해 상대의 배로 건너가는 등의 방식을 이용해 상대의 배 혹은 자신의 배에서 병사들이 서로의 무기를 들고 전투를 벌이는 방식이었다. 어떻게 보면 장소만 육지에서 바다로 바뀌었지 육지에서의 전투 방식과 크게 차이가 없다. 이러한 전투 방식은 비교적 파도가 잔잔한 지중해 지역에서 행해지며 얼마나 많은 병사를 배에 싣는지가 전투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였다. 당시 스페인은 막강한 육군을 자랑하고 있었고 지중해에 위치한 국가답게 해전에서 백병전의 전투 방식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영국은 강한 육군도 없었고 숫적으로도 스페인 군에 열세였다. 그러나 영국에게는 묘수가 있었다 그동안 신경 써서 개발해 온 성능 좋은 대포였다. 스페인의 것보다 넓은 사거리를 가졌던 영국의 대포는 스페인을 상대할 마지막 묘수였다. 결전의 날. 영국의 배는 스페인의 배와 멀찍이 거리를 두며 백병전을 피했고 우수한 화력과 사거리를 가진 대포로 그들을 제압했다. 그리고 그 승리의 날에 세계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넘어오는 순간이었다.
탬즈강변에 그리니치라는 곳이 있다. 왕립 해양아카데미가 있는 이 곳은 영국의 해군들을 양성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영국의 전성기 시절 전 세계 바다를 누비던 범선 커티삭이 전시되어있다. 영국이 바다를 제패하던 전성기를 상징하던 곳이기도 한 이 곳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전 세계의 표준 시간. 전 세계 시간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권력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정하는 힘을 의미한다. 이 땅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시간을 정하는 힘. 그 강력한 힘을 전성기의 영국이 가졌었다. 그리고 이 곳 그리니치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태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대학 신입생 시절 정치학 개론 수업시간에 처음 던져졌던 화두였다. 수많은 이야기 끝에 내려진 결론은 그것이었다.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힘. 중국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함으로써 그들 세상의 규격을 정하는 힘을 발휘했다. 그 후 한참이 지난 후, 전혀 다른 대륙의 영국은 세계의 바다를 손에 넣고 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간을 정하는 권력을 손에 넣었다. 대영제국은 쇠락했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그들이 정한 시간 아래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