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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넙죽 Jun 07. 2018

영국의 성공회를 만나다

영국의 종교 이야기

왕과 교회의 갈등, 켄터베리 대성당


 런던의 남동쪽에 위치한 켄터베리에 있는 대성당은 영국 기독교에 있어 매우 상징적인 존재이다. 영국에는 로마시대 때 기독교가 들어오게 되는데 이후 영국의 주인이 된 앵글로 색슨 족도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영국은 명실상부 기독교 국가로 자리 잡게 된다. 이곳 켄터베리는 앵글로 색슨족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한 성 오거스틴이 세운 켄터베리 대성당이 있는 곳으로 아직까지도 영국의 종교적인 구심점이 되고 있는 곳이다.


   켄터베리 성당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다. 토마스 베켓 순교 사건이다. 토마스 베켓은 당시의 왕이었던 헨리 2세의 충신이었으나 왕에 의해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된 후에는 철저히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게 된다. 다시 말해 왕의 말을 잘 안 듣게 된 것이다. 왕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도 꽤나 절친했던 신하가 자리가  바뀌었다고 해서 입장을 바꾸고 돌변한 셈이니 꽤나 배신감을 느낄 만 하나  대주교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토마스 베켓의 입장도 이해할 만하다. 그는 더 이상 왕의 신하가 아닌 신의 충복이 되었으니 말이다.


  둘의 입장 차로 인한 갈등은 그 끝이 좋지 않았다. 왕의 분노는 생각보다 컸고 그 분노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토마스 베켓은 왕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것도 켄터베리 대성당 안에서! 이후 교회에서는 토마스 베켓의 죽음을 순교로 인정하고  성 토마스라는 성인으로 추증했다.


  토마스 베켓의  살인 사건은 단순한 끔찍한 살인 사건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건의 본질은 따로 있다. 왕권이 종교권력을 압도한 것을 의미한다. 당시 교회란 전 유럽을 아우르는 큰 조직이었다. 왕이 아닌 로마의 교황에게 충성하면서도 막대한 양의 헌금과 신의 이름이라는 명분에서 나오는 권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당연히 왕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우면서도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싶어 하는 세력이었다. 헨리 2세의 권력이 교회의 권력보다 약했다면 과연 대성당에서의 대담한 살인이 가능했을까. 왕의 권력이 교회의 권력을 넘어서는 일은 후세에 또다시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작고 아름다운 켄터베리에서 그런 잔인한 살인사건이 일어났었다고 누가 믿을까
그것도 이렇게 아름다운 성당 안에서 말이다


헨리 8세와 성공회의 성립


  헨리 8세는 고민이 컸다. 형의 아내였던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지만 그녀와의 사이에서는 왕국의 후계자감이 될만한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 때문에 고심하던  헨리 8세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시녀 앤 볼린이었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현재 아내와 이혼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당시 영국은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이혼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왕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헨리 8세는 결심했다. 가톨릭이어서 이혼이 안된다고 하면 가톨릭을 등지기로. 헨리 8세는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과 결별하고 성공회(혹은 국교회)를 성립했다. 왕이 교회의 수장이 된 것이다. 더 이상 로마의 교황으로부터 간섭을 받을 일도 없어졌다. 


  헨리 8세가 이렇듯 기상천외한 일을 벌일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왕권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 권력을 넘어서는 강력한 왕의 권력. 영국은 이 사건 이후 당시 유럽의 주류였던 가톨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는 이처럼 강력한 왕권의 지원 하에 성립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영국 왕들의 대관식이 이루어지는 상징적인 성공회 사원, 웨스터민스터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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