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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K Oct 26. 2023

딸에게 보내는 편지

'삶의 외로움'을 미리 안내하는 어른을 만나고 싶다.

 오늘은 일찍이 나에게 아버지상을 만들어 준 김규항 작가의 편지글을 공유하고자 한다. 


 고딩 시절, 딸의 전 생애를 찍어 사진집을 낸 <윤미네 집>의 저자 전몽각 선생에 이어 내 남성관에 지대한 영향을 준 김규항의 이 편지글을 기억해 낸 이유는 끊임없는 결정사의 전화 덕분이다. 


 그녀는 어김없이 "예쁜 만남 계속하고 계세요?"라고 물을 것이 뻔했다. 그동안 만나는 이가 있노라고 대답했다. 결정사의 호객행위에 대응하는 가장 확실하고도 간편한 대답이었으니 당연하다. 그 덕에 짧게 끝난 통화 뒤에 어쩐지 오늘은 여운이 길다.


 잊을만하면 오는 매니저의 전화에 나는 또 문득 나의 대상 없는 그림에 대해 떠올려본다. 왜 이상적인 남자상을 건너뛴 채, 있지도 않은 내 아이의 아버지상에 떠올려냈는지는 모르겠다. 이 또한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아마 나는 다음 세대에게 가능하면 일찍 '외로움'에 대해 알려 줄 어른을 찾고 있는 듯하다. 물론 티 없이 맑고 밝게 자라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수록 더 나는 불안감에 휩싸일 것이다. 나는 김규항이 말하는 '외로움'에 대해 미리 이야기해 줄 것이다. 아버지가 못한다면 내가 그렇게 해줄 것이다. 그래서 부디 부러지거나 꺾이지 말고 '아 이게 그때 엄마한테 들은 그런 건가 보다.'라고 안심했으면 좋겠다. 혹은 "뭔 헛소리냐 생각대로 살아내도 세상은 이토록 따듯하던데." 고 따져 물으면 기꺼이 그리고 감사히 그 토론의 장에 마주 앉을 것이다. 


 그래 그럼 그냥 내가 해주면 되는 건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


김규항


 

단아. 아빠는 지금 강원도 어느 시골 마을에 와 있다.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아저씨 집이야.

일 때문에 왔지만 “날씨가 죽이기 때문”이라는 핑계로 둘이 술만 먹고 있다. 아빠는 즐겁다.

갈수록 사람들은 빠르고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시간만 좋아한다. 그러나 아빠는 이런

아무것도 아닌 시간, 느리고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시간이 참 좋다.


술을 먹다 단이가 생각났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말하는 단이

얼굴을 떠올리며 혼자 웃었다. 아빠는 그럴 때 담담한 체하지만 속으론 아주 많이 기쁘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자기 생각’을 ‘옳은 생각’처럼 말하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 아빠는

단이가 아빠의 잘못을 들추어내길, 그래서 아빠가 잘못을 인정하길 기대하곤 한다. 기대는

점점 더 잘 이루어지고 있다.


단이는 단이 이름을 닮았다. ‘丹’(붉을 단). 처음 그 이름을 지었을 때 좋다는 사람이 없었다.

칭찬은커녕 “이름이 그게 뭐야?” “배추 단이냐 무단이야?” 따위 놀리는 말만 가득했다.

그런데 단이가 이름과 합쳐지면서 확 달라지더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말은

아빠가 억울할 만큼 빨리 나왔다.


아빠도 아빠 이름을 조금 닮았다. 단이는 아빠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니? 홀 규에 늘 항,

‘늘 홀로’라는 뜻이다. 아빠는 어른들이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물어본 적은 없다. 아빠는

어릴 적부터 왠지 그 이름이 좋았다. 지금도 그렇다. 아빠가 외롭냐고? 그래 아빠 주변엔

좋은 사람들이 아주 많다. 하지만 단아.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꼭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다. 사람은 외롭지 않아도 생각은 외로울 수 있단다.


이오덕 할아버지를 기억하니? 아빠가 누구보다 좋아했던 분이지. 아빠는 그분을 돌아가시기

오 년 전쯤부터 사귀었다. 할아버지는 워낙 훌륭하게 사셨기에 그 뜻을 따르는 이들이 참

많았다. 그분이 아빠 글을 읽고 연락을 해오자 아빠도 한달음에 만나러 갔다. 그분을 사귀면서

많은 걸 배웠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분은 당신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너무나 외로워하셨다.


아빠는 그분의 외로움이 그분의 올바른 삶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단아. 올바르게 산다는 게

뭘까? 아빠 생각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 삶’이다. 사람들은 지난 올바름은

알아보지만 지금 올바른 건 잘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가장 올바른 삶은 언제나 가장

외롭다. 그 외로움만이 세상을 조금씩 낫게 만든다.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늘 그렇다.


예수님은 가장 외롭게 죽어갔다. 아무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죽인 힘세고 욕심 많은 사람들뿐 아니라 따르고 존경한다는

사람들에서 오히려 더 많았다. 그 후 2천 년 동안도 그랬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다. 예수님은 ‘2천 년의 외로움’이다.


단이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많으니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아빠보다 더 많을 거다. 하지만

단이의 거짓 없는 성품과 행동이 단이를 외롭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단이가 외롭길

바라지 않지만 단이가 올바르게 산다면 단이는 어쩔 수 없이 외로울 거다. 단이가 외로울 거라

생각하면 아빠는 마음이 아프다. 외로움은 어디에서 오든 고통스럽기 때문이야. 단이가

외롭고 고통스러울 때 이 편지를 기억하면 좋겠다.


아빠는 아빠 책 머리말에 이렇게 적었었다. “그러나 내 딸 김단이 제 아비가 쓴 글을 읽고

토론을 요구해 올 순간을 기다리는 일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가.” 아빠는 정말 그 순간을

기다린다. 지금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단이도 술을 좋아하게 될 거다. 내 딸아, 너의 외로움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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