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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K Feb 06. 2024

"난 잘 도착했어"

별안간의 책 선물이 일으킨 마음의 파동

처음 만나 밥을 먹은 날, 그 한 번에 몇 겹으로 접혀있던 수많은 세월이 풀어져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이처럼 느꼈던 K가 어느 날 카톡으로 대뜸 주소를 묻는다. 주변에 이런 사람이 두엇 되는데 다들 츤데레에 마음이 따듯한 사람들이다. 거절할 일까지 미리 생각해서 일단 내놔라!라는 식이다. 그 마음을 나도 알기에 당신 주소도 이리 내놔라!라고 했다가 대차게 거절당하고는 내 주소만 고백했다. 


집을 비운 사이, 택배 기사님이 보내주신 K의 선물이 사진으로 먼저 도착했다. 사진 속, 현관 앞에 덩그러니 네모 반듯한 책 한 권이 쓸쓸히 기대 있는 걸 보니 그 이역만리에서도 저걸 어쩌나, 얼른 보고 싶은데. 등의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캐리어 바퀴도 못 닦아 신발장에 대충 세워두고는 들어오자마자 책을 뜯어봤다. 


'어라, 지금 내 인생이 생중계되고 있나'



막 도착한 내가 마주한 책의 제목이 '난 잘 도착했어' 라니.


사실 SNS 세상이라는 것이 속은 알 길이 없이 누가 보면 아무 생각 없고, 누가 보면 사치스러우며 누가 보면 할 잔소리가 잔뜩 일수도 있는 일이다. 모든 것을 설명할 이유도 필요도 없으니 일단 그 이야기는 묵혀두기로 한다. 모든 좋고 즐거운 일들만 엮어 올리게 되니 누군가는 불편하고 누군가는 좋아해 주었을 일이다. (실제로 "선배니까 하는 조언인데.... "라고 시작되는, 철없이 사생활을 생중계하는 사업초짜가 걱정되는 선배의 문자를 받기도 했다.) 


'난 잘 도착했어'가 지금의 나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너의 일과 관계없이) 나의 순간순간으로 잘 도달하고 있다.

난 잘 헤매고 돌아왔는데, 지금의 너는 어때?


난 잘 도착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긍정확언처럼 미리 얘기해보고 있지만 자신이 없네.



다양한 의미가 될 수 있겠다.


나는 요즘 늘 집에 들어올 때 비밀번호를 꼭 한번 틀린다.(물론 오늘도 그랬다.) 틀릴 때마다 헛웃음이 나는 일이다.(며칠 정도면 적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앞집에서 보면 날 도둑인 줄 알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나의 다채로운 사람과의 이별 후에는 불현듯 세상이 무서워 바꾼 뒤로는 거의 6-7년 동안 바꾸지 않은 비번이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둔하고 보수적이고 때로는 엄청나게 큰 구멍이 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곁에 사람을 두는 일도, 빗장을 풀면 좀처럼 닫히지 않는 일도, 그 이후에는 덮어놓고 신뢰를 하다 일어나는 좋지 않은 일에 속절없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까지도. (심지어 숫자에도 정을 준다. 이쯤 되면 이것은 질병이다.)


아마도 청연이모님이 나와의 통화 중에 내가 전화기 너머 불러주는 비번을 입으로 크으게 함께 외치며 누르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그 번호를 그대로 쓸 텐데. 그 일이 괜히 아쉬울 정도다. 매일, 순간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몸에 익은 길을 따라 비번을 누르는 날엔 영락없이 틀리게 되니, 그럴 때마다 쓸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예전보다 굉장히 많이 나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변화를 주저하는 사람이다.


독립 이후에는 내 집에 나를 제외한 누군가가 비번을 직접 누르고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다. 없으면 나를 기다리면 될 일이고 있으면 내가 열어주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알렸다. 어떤 특별한 이유라기보다는 그게 내가 느끼는 친밀함의 정도다. 다 털어가도 괜찮고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난 대도 탓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집에 있을 때 누군가 비번을 누르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 사람의 성정이 버튼을 누르는 속도나 리듬감에서 온전히 느껴지기도 하고 그게 누구냐에 따라 설렘과 반가움, 복잡한 감정이 덮쳐오기도 한다.


짐을 채 다 풀지도 못한 채 대충 끓인 김치찌개를 퍼 먹으며 중얼거려 본다.



난 잘 도착했고 때로는 괜찮고, 때로는 괜찮지 않아. 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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