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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K Jul 27. 2023

8월의 다이어리

한 자리씩 늘어나는 번호표 달고 열두 조각의 고됨을 견디는 일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미네이터)의 다이어리가 1월도, 12월도 아닌 한 해의 한복판 7월 중순 출시되어 집으로 도착했다. 


 

 간간히 그의 SNS 계정을 통해 제작 과정을 업데이트받고 있었기 때문에 더 흥미롭고 기대되기도 했다. 그의 괴로움이 느껴질수록 더욱더 기대감은 높아만 갔다. 야근하는 직원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대표의 마음이 이런 걸까?


몇 번의 라이브와 이것저것 댓글로 의견을 모은 그는 몹시 귀여운 결과물을 만들어 보냈다. 


빠글한 인트로 그림, 작가가 신이 나서 그린 티가 난다 :) 
그는 네이밍 업으로 삼은 나를 민망케하는 엄청난 작명 실력을 가졌다. 다이(루)어(지)리 역시 혀를 내두를 센스...
언데이티드 다이어리. 그래서 여름에 만날 수 있었다.


한 해의 중간에 새 다이어리를 받으니 다소 부담스럽다가도, "undated"라고 하니 또 마음이 푸근해지는 어리석은 생각이라니. 결국 보고 배운 그대로 괜한 시작과 끝을 만들어 두고 또 의미를 부여하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거의 20년째 매 해 결산을 하고 있다. 한 해가 끝날 무렵엔 저 10개 정도의 질문에 답을 채우며 한 해를 돌아보는 나만의 의식을 치른다. 꼭 하나의 답변만 남겨야 하기에, 어떤 해에는 몹시 치열하고 어떤 해는 도무지 채울 길이 없다. 아마 기억에 2012년에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던 것 같다. 


결산의 예시

2020년 결산
1. 2020년의 영화: TENET
2. 2020년의 노래: 취중진담
3. 2020년의 책: 보고서
4. 2020년의 음식: 보이차
5. 2020년의 술: 복원 창호와 위스키
6. 2020년의 여행: N/A
7. 2020년의 인물: S
8. 2020년의 사건: 2020년 5월 25일
9. 2020년의 말: 욕심

 

 블로그에 남기는 버전은 간단하게 두고, 개인적인 메모에는 왜 저런 선정을 했는지 간단하게 써두기도 한다. 메모가 없어 도무지 왜 저렇게 생각했는지 모를 때도 물론 있다. 


 일 년 열두 달이라는 서로의 약속만 없어진다면, 우리의 하루하루는 늘 특별할 것 없이 같은 날이다. 그의 말대로 "undated" 인 것. 하지만 우리의 삶은 늘 한 자리씩 늘어가는 번호표를 달고 열두 조각의 고됨을 견디는 일의 연속이기에. 숨이 턱까지 찬 러너에게는 어떤 의미로든 반환점이 필요해진다.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에는 아주 가늘지만 깊은 벼랑 같은 틈이 존재한다. 그 틈을 애써 벌려 잠시 쉬어가라고 꾸깃꾸깃 책갈피처럼 메모 해 끼워두는 것이다. 

 

 12월 31일까지 외면하며 묵혀 둔 먼지들을 벼랑 끝까지 몰고 와 마지못해 쓸어 넘기면, 아주 무거운 것들은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게 깊은 어둠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공중으로 부유한 가벼운 것들은 들숨에 섞여 다시 폐 속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그런 것들은 다음 해, 언젠가에 몇 번의 한숨으로 다시 뱉어내야 할 것들이겠지.


 8월의 다이(루)어(지)리 덕분에, 중간 정산을 해본다. 

예상해 보니 올해의 책을 선정하기 어려울 것이고(이례적으로 너무 읽었다) 올해의 술 역시 쓰기 어려울 것 같다. (금주를 한지 꽤 되었다) 벌써 열두 조각의 고됨 중 일곱 조각은 해치웠다. 너무 빠른가? 너무 느린가? 빠르다고 느낀다면 좀 더 촘촘히 살아내면 될 테고, 느리다고 느낀다면 이미 빼곡하니 호흡을 늦춰보자.



덕분에 고마워요. 일러스트레이터미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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