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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Sep 07. 2021

2 어느 젊고 늙은 대화의 기록

일단 하면 되는 거 아는데, 그런데.

새벽 6시 눈이 떠져 운동복을 입고 대충 모자를 눌러 쓴 뒤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차갑지만 깨끗해 머리 속이 비워지는 새벽공기.

바쁘게 아침의 문을 여는 사람들만이 오가고 그런 사람들 속에 섞여있으면 괜한 우월감이 느껴졌다.


나는 한 가지에 특출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분야를 적당히 잘하던,

못하는 게 없지만 그렇다고 한 가지에 꽂혀있지는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게 오히려 참, 어려웠다.     


무엇을 해야하지. 나 이제 뭐 해야할까. 나 뭐 먹고 살아.

대학 졸업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끊임없는 고뇌와 번뇌가 하루에도 수십 번.

왜 다들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도 갑자기 걷는 방법을 갑자기 까먹는 순간, 맨날 아무렇지 않게 쓰던 단어가 너무 이상하게 생겨서 맞나 싶은 순간, 눈 깜빡이는 게 갑자기 신경 쓰이는 순간 말이다. 숨 쉬고 싶은데,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숨 쉬는 방법을 까먹었을 때. 지금이 딱. 그런 순간이다.


동기 민성오빠는 얼마전부터 지방직공무원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세실이는 얼마 전 작은 광고회사에 취직했는데 온갖 잔심부름을 하면서 퇴근은 마지막 버스시간에 맞춰서겨우 퇴근을 할 수 있다며 내가 이러려고 그동안 열심히 살았나 싶어 퇴사할거라고 울며 전화가 왔다. 인선이는 작게 카페를 하나 차려보려고 강의 들으러 다닌다고 했다. 카페 알바를 유독 많이 했던 친구였다. 요한 선배는 4년의 취준기간 후에 대기업에 입사했다. 한참을 연락이 없어 죽었나 살았나 싶을 때 쯤 취직을 했다며 잘 지내냐고 연락이 왔다. 역시 자기 살 길이 트여야 주변도 보이는거구나 싶었다.



한 동안 들리는 소리들이 다 그런 소리들 뿐이더니, 나보다 반 년 먼저 취준 전선에 뛰어든 지현이가 맥주를 사서 작은 대학가 9평짜리 나의 방공호로 쳐들어왔다. 내가 비밀번호를 치는 걸 뒤에서 보고는 언젠가부터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오는 미친년. 조만간 비밀번호 바꾼다 해놓고 또 깜빡했다.


"요즘 뭘 해도 즐겁지가 않아. 너무 힘이 들어, 즐겁지가 않은 게......, "

내가 안주로 소세지를 굽는 동안 세 캔을 곧장 비우더니 한다는 소리가 같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내가 이래서 요즘 너를 안만나려고 했건만.

"최근에 본 면접에서 한국어자격증은 뭐 때문에 준비했냐더라. 공기업 가는 과정 중에 사기업에 발 걸치려는 거 아니냐 이거지. 참내, 그게 뭐가 어때서, 결국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데. 그게 왜 내가 떨어지면 혹시 그거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일말의 이유가 되어야 하는건데? 열심히 살라길래 열심히 살았더니 왜 열심히 살았냐고 묻는 세상이다."

"......,"



"너는 뭐 할거야?

"뭐라도 하겠지...?"

"이제 확실히 정해야 하는 때가 왔단다 친구야. 요즘 한 우물만 파도 물맛 볼까 말까야."

6개월 먼저 면접 보러 다녔다고 인생 선배 다 됐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기에 얼굴만 일부러 더 웃긴 표정으로 구겨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 그래도 나이가 좀 들면 뭔가 하나라도 확실해지는 게 있겠지 했다? 그런데 아니었어. 지난 날에 확실했던 것들은 점점 더 불확실해지고,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있는 게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 그래서 딱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게 너무 힘이 드네..

젊음이 무기인 때에는 어떤거라도 일단 시작해보면서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다른 길로 가보라는 말이 맞다는 건 알겠는데. 이게 머리로는 알겠고, 내 마음이 모르겠으니까....

어쨌든 내가 선택한 건 돌이킬 수 없을테니까. 이래서 사람들은 다들 후회를 하나 봐."


"완벽하게 후회 없는 결정이라는 게 어디있겠어. 그래. 이게 그래도 내 최선이었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는거지. 그렇게 살아지는거지 우린."


다음 날 아침,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들었다가 깨 옆에 엎드려 누워있는 지현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어째 숨 쉬는 작은 미동도 없어서 덜컥.

벌떡 일어나 코에 손을 가져다 대봤는데, 아주 작게 미세하게 머리까지도 아니라 겨우 코에서 시작되었다 끝나는 만큼의 숨만을 들이쉬고 있는 것에.

그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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