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보다 하산의 어려움을 몸소 배우기 까지.
결국에 나는 성판악을 올랐던 나의 과거의 기억을 미화시켰고, 그 끝내 다시 정상에 올라보고자 이번에는 과감하게 관음사코스를 선택해 다시 날을 잡게 된다.
이름하여 2022.7.26 한라산 정복의 날이다.
한라산 하면 백록담인데 정상에 올라 백록담을 보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움이 남았다.
첫 한라산의 설렘이 만들어 낸 좋은 기억이 나를 다시 백록담으로 이끌었고, 그래서 이번엔 너무 더워지기 전에 올라가 보자고 남자친구와 서둘러 날을 잡았다.
이전의 첫 한라산 등반의 시작이 갑작스러운 한파주의보였다면, 이번 한라산 등반의 시작은 갑작스러운 폭염주의보였다. 그래도 한라산의 올라가는 길은 오히려 서늘하다는 후기를 많이 읽었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가보자고 결정했다. 날씨뿐만 아니라 지난번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성판악 코스가 아닌 관음사 코스로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워낙 힘든 구간이 많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올라갈 한라산이라면 풍경이 더 예쁜 코스로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선택했다. 하지만 새벽 택시를 타고 가면서 기사님과 대화를 나누며 괜한 선택이었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긴 했더랬다. 본인도 안 올라간지는 수십 년이 됐지만 관음사 코스는 정말 각오하고 올라가야 한다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시는 그 타이밍이었다. 나는 쿨하게 "근데 풍경은 두배로 예쁘다고 하더라고요~ 천천히 조심해서 잘 올라가 봐야죠~"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쫄았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 뭐하나 이제 오를 시간인데.
역시 모든 등산의 처음은 설렘으로 인한 아드레날린의 폭발로 시작되는 듯했다. 역시나 풍경은 예뻤고, 날씨 진짜 완벽하다 라는 말을 계속하며 올라갔다. 첫 번째보다 사진을 덜 찍었지만 오히려 여유로웠다. 관음사 코스는 확실히 성판악 코스와는 다른 풍경이었다. 큰 바위를 건너서 지나가야 하는 구간도 있었고, 큰 계곡을 지나는 다리도 많았다. 이때까지는 관음사 코스로 와보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리를 지나 천국의 계단을 맛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첫 번째 천국의 계단.. 아니 지옥의 계단이라고 하면 누구나 공감할 계단을 시작으로 가파른 계단의 연속이었다. 계단을 오르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으면 쉬고, 또 허벅지가 터질 듯 오르다 쉬고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무한 계단 오름의 연속이었던 등산. 그렇게 계속 올라가다 중간중간 현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를 보게 되는데 이게 난이도 중 코스라고~? 더 올라가면 상 코스가 있다고~? 하며 올라갔다. 분명 정상까지 절반은 왔는데 앞으로의 구간 난이도가 상이라니 그 또한 그렇게나 괴로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높이 올라가니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힘듦을 잊을 만큼의 풍경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잠깐씩이었지만. 구름이 내 발아래에 있다는 경이로움과 대자연이 주는 광활함과 가슴 탁 트이는 시원한 바람까지. 쥬라기공원의 한 장면과 같은 한라산의 모습에 우와를 남발하며 올랐다. 그러다 도착한 삼각봉 대피소는 정말 아름다웠다. '한라산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확실했다. 깎아지르는 뾰족한 돌산에 우거지게 자라난 나무들, 산의 굴곡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내가 오른 산 중 가장 멋진 풍경이었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삼각봉에서 조금 쉬었다 그 풍경을 힘 삼아 다시 정상으로 올랐다.
그때부터였을까. 정말 극한의 지옥을 맛보았다. 오르고, 또 오르고, 오르고, 또 올랐다. 계단이 미친 듯이 많았고 대체 정상은 언제 나오는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그러다 뒤를 돌면 또 아름답고 그랬다.
그렇게 힘들다가 정신 줄을 놓을 때쯤 정말 갑자기 정상이 나왔다.
"와, 다 왔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물이 고여있는 백록담. 정말 환상 그 자체였다. 오르는 길에 하산 중인 사람들이 "오늘 물 고여있어요! 힘내세요!" 해주었기 때문에 물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또 몰랐지.
그렇게 오른 정상은 해와 가장 가까이 있구나 싶을 만큼 뜨거웠지만 그래도 자리 하나 잡고 신발을 벗어던지고 힘들게 짊어지고 온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었는데, 와 이게 이렇게나 맛있다고? 올라왔을 때의 힘듦은 싹 씻겨나갈 맛이었다.
그렇게 정상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조금 휴식시간을 가지는데 다리가 확실히 문제가 있구나 싶었다. 일단은 발바닥과 발목이 너무 아팠고, 더 최악은 왼쪽 무릎이 너무 아프다는 것이었다. '내려갈 때 죽어나겠다.' 나는 내 미래를 이미 알고 있었다.
더 쉬면 제시간에 못 내려가겠다는 오빠를 따라 하산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초반부터 망했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발목과 왼쪽 무릎이 너무 아팠다. 내리막을 한 발 디딜 때마다 왼쪽 무릎에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고 발목은 후들거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라올 때 생각보다 물을 많이 마셔버린 터라 내려갈 때 마실 물을 많이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내려갈 때는 체력적으로 더 지쳐있기 때문에 물을 조금 더 챙겼어야 했는데 심각성을 깨닫고 조금 더 빨리 내려가 보자고 아픈 다리를 더욱 재촉했다.
올라가는 길과는 다르게 내려가는 길에는 오빠와 정말 대화 몇 마디 나누지를 않았다. 무릎이 너무 아파 한 걸음에 한 신음소리를 내느라 말할 기력도 없었고, 오빠도 내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지쳐 보여서 말을 걸면 큰일 나겠다 싶었다. 그렇게 내려가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다. 중간중간 무릎이 아파 도저히 못 내려가겠는 몇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쉬는 순간 못 일어나겠다는 생각에 쉬는 시간을 줄여 내려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고통만 있는 통나무가 된 느낌이랄까. 한계는 이미 넘었고 제정신이 아닌 그 언제 쯔음, 돌계단에 앉아 쉬고 있는 부부를 보았다. 부인 분이 다리가 아픈지 주저앉아 있었고, 남편분은 조금 체력이 남아계신지 부인 분의 다리를 주무르며 마사지해주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몽골몽골 해지면서 계속해서 정색하고 있던 얼굴도 미소로 풀어주고 좀 쉬고 가고 싶은 타이밍이 있었는데, 때마침 타이밍 좋게 이미 나와 같이 한계를 넘어선 얼굴을 한 오빠가 아플수록 빨리 내려가야 한다고 시간이 더 걸리겠다는 말을 해서 사실 속으로는 굉장한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그래 쉬긴 뭘 쉬어. 미친 듯이 내려가자 생각하고 이를 꽉 깨물었다. 이것이 힘들어서 오는 짜증인가, 아파 죽겠는데 재촉하는 남자친구에서 오는 짜증인가. 어쨌든 짜증이 나긴 했는데 이게 힘이 드니까 그런 짜증도 힘이 나야 내는 거구나 싶었다. 아 지금은 짜증의 이유를 생각해서는 안 되는 순간이구나. 오빠나 나나 절체절명의 순간이구나. 물이 없으니 정말 목이 말라와서 정신이 아찔해졌기 때문에 정말 내려가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때부터는 정말 좀비처럼 내려가기만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오빠가 재촉하지 않고 쉬었다면 내려가는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리긴 했을 거다.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고, 다리는 쥐가 나고, 발목과 무릎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고, 목은 말라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상태로 2시간 정도를 내려갔다. 정말 죽겠다 싶을 때 '한라산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하고 출구가 보였다. 조금만 더 늦게 출구가 보였다면 아마 난 주저앉아 울었을 거다.
나중에 다 내려오고 나서 오빠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그때 화났었냐고 물으며 기분이 나빴으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내가 표정이 안 좋기는 안 좋았나 보다. 서운한 마음이 들고 짜증 난 건 사실이었지만 그냥 힘들어서 그랬던 거라고 말하며 웃었다. 사실 그렇게 짜증이 났다는 사실도 내려와 편의점 얼음컵에 파워에이드 가득 채워 들이키고 나니 그저 웃겼다. 무엇보다도 오빠도 나만큼이나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다 이해가 됐다.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서 그 사람 내면의 본능이 드러난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무사히 내려오고 나니 내려올 때 들었던 안 좋은 감정들은 다 필요가 없더라. 그냥 이 힘든 여정을 함께 무사히 마쳤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등산보다 하산이 훨씬 힘든 일이라는 걸 뼈에 새기며 한라산 정복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너무 아름답고 감격스러웠던 관음사 코스의 한라산 풍경. 그때의 여운을 다시 느끼기 위해 찍었던 사진을 보고 또 보고 자랑을 엄청 했다. 나는야 한라산 정복자.
하지만 최소 5년은 앞으로 관음사 코스로 한라산 갈 일 없을 거라고 오빠한테도 말해뒀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이걸 주식 시장에서 느꼈어야 하는 건데... 나는 한라산에서 느끼게 됐다.
인생은 등산이라고 하던데, 내 인생이 한라산은 아니길 바라며.
그래도 너무 즐거웠던 한라산 정복자의 길. 이제 여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