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
수내동 날다람쥐
예전에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자발스럽게 싸돌아다니는 성격 탓도 있지만 물건을 쟁여놓길 좋아하는 다람쥐 같아서 붙여진 별명이라 생각된다. 다람쥐가 도토리 두 개를 하나는 볼에 넣고 하나는 나중에 먹어야지 하며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잊어버리는 바람에 그 도토리가 싹을 틔워 숲이 되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난 정말 ‘다람쥐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일단 폐기하기로 생각한 마음들은 싹둑 잘 잘라내 땅속에 잘 묻고 쉽게 잊는 것도 그렇다. 누가 들으면 장점이라고 하겠지만 스스로는 나만이 알고 있는 매정함이다. 이런 성향 탓인지 디아스포라가 되어 나그네 삶을 살고 있으니 나름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았다는 생각이다.
오랜, 다년간의 파견지 생활을 통해 이 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깨달은 게 있다면 그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집’을 잘 구하는 게 관건이라는 거다. 그 이유는 아마 많은 파견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공감하겠지만 절대적 물리적 고독의 시간을 슬기롭게 보내는 데 집은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그래서 말레이시아에서도 세 번이나 이사를 했을는지도 모르겠다)
리투아니아로 오기 한 달 전부터 줄기차게 온라인 부동산(https://www.aruodas.lt/)을 들락거리며 집을 찾았다. 먼저 학교와 가깝고 월세가 적당하고, 그리고 마지막 조건은 조용한 주택가였다. 하지만 조금 괜찮다 싶은 집은 금세 나가기 일쑤였고 한국에 있는 상태에서
“내가 보름 뒤에 거기 있는데 그때 집을 좀 볼 수 있겠니?”라는 메일에 답장을 주는 집주인은 열 번 보내면 한 명 정도였다. 그 한 명이 지금 집주인이 된 요나스 씨다.
처음 집주인에게서 온 답은 “너 리투아니아 오면 연락해, 그때까지 집 안 나갔으면 보여줄게”라는 짧은 메시지였다.
리투아니아에 도착한 다음 날 학교 기숙사의 역한 화장실 냄새와 파이프 진동 소리에 잠을 설친 후 바로 요나스 씨에게 연락을 했다.
“나 그때 메일 보냈는데 기억하니?”
“나 어제 리투아니아에 왔어”, “오늘 집 볼 수 있을까?”
“물론이지, 오늘 5시에 보러 올래”
처음엔 몇 군데 집을 더 보고 결정하려고 했지만, 대부분의 집주인들이 영어를 잘 못한다는 점과 집주인 요나스의 일사불란함이 마음에 들어 다른 집 보기로 한 약속을 취소하고 바로 계약을 했다.(부동산 계약은 2달치 월세를 보증금으로 지불해야 하고 꼭 집의 명의가 집주인 이름으로 되어있는 최근 문서를 요청해서 확인해야 한다)
“나 너 이름 어제 linkedin에서 찾아봤어, 무슨 물류회사 중역이던데?”
“응, 맞아 나 물류회사에서 일해”, “나도 너 이름 찾아봐야겠다”
계약을 하면서 나름 나 굉장히 용의주도한 사람임을 어필하려고 농담처럼 던졌는데 무거운 캐리어 두 개를 3층까지 거뜬히 옮겨주신 유쾌하고 친절하신 집주인 요나스 씨는 잘 받아주신다.
이렇게 해서 이 집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윗 층에는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는 5살, 7살 꼬마 아가씨 자매와 젊은 부부가 살고 1층에는 눈 오는 날 먼저 눈을 치워주시는 따뜻한 노년 부부가 사신다. 동네 뒤로는 조그만 호수가 있고 지금은 오리가족이 겨울을 나고 있다. 동네 꼬맹이들이 천연 눈썰매 장으로 만들어 버린 동네 자작나무 숲에서는 늘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를 만나게 되고 그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동네는 대로변 차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창문을 열면 앞 동네 뾰족한 지붕들이 빨간 머리 앤이 살던 green gable이 저렇게 생겼었을 거야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적은 인구밀도 탓인지 리투아니아는 어딜 가나 공간이 넓고 숲이 많다. 인구는 우리나라의 절반 정도(2천7백만)이지만 국토면적은 그리 차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초 고층 아파트는 볼 수 없고 단층 아파트나 그림 같은 개인주택이 대부분이다. 재밌던 점은 건축 연도 1890 몇 년으로 시작되는 아파트도 구 시가지에서는 종종 발견할 수 있었고 신축 아파트보다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는 점이었다. 빌뉴스에는 15-16세기 중세시대 건물뿐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 시절 건물들도 많아서 도시 전체가 건축사 박물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앞 동 같은 층 아주머니는 늘 나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서 주방에 불을 켜신다. 외국 생활을 통해 터득한 집 구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 중의 하나는(물론 개인적 취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시야에 숲이나 자연이 시야에 들어오는 집보다는 누군가 살고 있는 집이 보이는 게 좋다는 의견이다. 사람은 누군가가 집에 불을 켜고 가족들과 산책을 하고 음식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나 또한 잘 지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묘한 위로를 받게 되는 것 같다.
어제 동네 마트에 가서 레몬나무를 사서 화분에 심었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꽃과 나무를 좋아해서인지 종종 꽃을 사들고 버스에 오르는 할아버지들도 만날 수 있고 어느 마트든 작은 원예 코너가 있다.) 반려묘, 반려견은 키우기가 어렵기에 반려 식물을 종종 사게 된다. 한국 집에서 키우다가 출국 전에 분갈이를 해준 레몬 나무와 똑같은 사이즈의 나무를 발견하곤 눈에 밟혀 도저히 안 들고 올 수가 없었다. 레몬 나무에 구매한 날짜와 이름을 붙여 주곤 창가에 두고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나와 함께 리투아니아에서 잘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