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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준가 Sep 13. 2020

동네 세탁소



여름 내 베란다에 있는 작은 창고에 옷 몇 벌을 걸어놨다. 그 창고의 천장에는 옷을 걸 수 있는 봉이 설치돼 있고, 내 옷 중에 긴 코트들은 안방 옷장에 채 안 들어가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길이가 넉넉한 그곳에 둔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여름이 저물고 있다고 생각한 며칠 전, 무심코 창고 안을 들여다봤다가  소리를 질렀다. 감색 트렌치코트가 온통 하얗게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이걸 어쩌면 좋을지 발을 동동 구르며 룸메에게도 물어보고 트친들에게도 물어보고 하다가 도저히 그대로 세탁소에 맡길 수는 없어서 얼마 전 산 스팀청소기로 스팀을 쏘이기로 했다. 물세탁이 가능한 옷감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바로 세탁기에 넣었겠지만 반드시 드라이클리닝해야 하는 옷이라 궁여지책으로 스팀을 선택한 것이다. 버리는 게 제일 쉽긴 하지만 내가 가진 옷 중 몇 안 되는 좋은 옷이었다. 그나마도 내가 산 건 아니고 언니가 작아지고 질려서 이제 안 입는다며 엄마네 집에 버리고 간 걸 내가 날름 가져와 잘 입고 다녔다.


벨트도 소매도 어쩜 그리 구석구석 골고루 피었을까. 곰팡이는 정말 정말 너무너무 싫은데. 싫은 마음을 꾹 누르고 침착하게 스팀 청소기를 움직였다. 과연 스팀이 닿은 부분은 곰팡이들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런데 악성인 부분이 있는지 몇 번을 쐐도 곰팡이 얼룩이 남은 부분도 있었다. 곰팡이들은 얼추 다 사라졌는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스팀이 너무 강했는지 옷감이 쭈글쭈글해져 버렸다. 일단 세탁소에 가져가서 진단을 받아보고, 안 된다고 하면 그때 버리기로 했다.


작년까지는 바로 옆 단지에 프랜차이즈 세탁소가 있어서 거기에 맡겼는데 올해 없어져 버렸다. 새로운 세탁소를 찾아야 할 때였다. 나는 무작정 네이버 지도를 열고 현재 위치를 찍은 다음, "세탁소"라고 검색했다. 주변 세탁소들이 주르륵 나왔다. 프랜차이즈도 있고 개인 세탁소도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을 찾으니, 어라? 바로 내가 사는 단지 상가에 세탁소가 있었다. 외출할 때 매일 지나는 길목이고 바로 옆의 슈퍼에도 자주 들르는데 왜 기억에 없었담? 그 길로 곧장 코트를 들쳐 매고 세탁소에 갔다.


주인아저씨가 다림판 앞에 서 계시다가 나를 보고는 마스크를 찾아 쓰셨다.

"그래, 뭐 하시려고?"

"아저씨 이게 곰팡이가... (후략)"


아저씨의 설명으로, 모가 많이 섞인 옷감은 습기를 한껏 빨아들이기 때문에 곰팡이가 나기 쉽다는 것. 이런 옷은 관리를 신경 써서 해야 한다고 하셨다. 내가 걱정하던 쭈끌쭈글은 아마 세탁하고 말리면 없어질 것 같다고 하셨다. 스팀 좀 쪼인다고 옷감이 상하지는 않는다고. 곰팡이 자국은 깊은 것은 한번 세탁으로 안 지워질 수 있고, 두 번은 해야 될지 모른다고.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에 모든 궁금증이 풀려 안심하고 세탁을 의뢰했다. 아저씨는 옷을 받아놓고, 다림판 구석에 놓여 있던 수기로 작성하는 스프링 노트와 펜을 집어 드셨다.


"어디예요?"

 무슨 말씀인가 싶어 노트를 봤더니 거기엔 "OOO동 OOO호"라고 적힌 몇 개의 리스트가 있었다.

"아, 저는 OOO동 OOO호예요."

아저씨의 거침없는 손글씨로 적힌 우리 집 주소를 보고서 세탁소를 나왔다.


동네 세탁소를 이용한 것이 처음이 아닌데도 이번 세탁소 경험은 좀 다르게 느껴졌다. 보통은 프랜차이즈 세탁소는 물론 동네 세탁소를 가더라도 전화번호와 이름을 적고 나온다. 영수증 혹은 내 이름이 적힌 보관증도 받아서 나온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 호를 적고는 끝이었다.


나는 그동안 '아파트 키드'의 감성을 이해 못하는 축이었다. 이번이 내가 사는 첫 번째 아파트이기 때문에. 그래서 살던 아파트가 재개발된다고 아쉬워하고 그걸로 행사도 하고 책도 만드는 게 꽤 낯설게 다가왔다. 그런데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내 이름도 전화번호도 없이 세탁소는 늘 그 자리에 있고, 나는 오다가다 옷을 찾으면 된다는 단순한 규칙. 동과 호 만으로 통용되는 암묵지 같은 것.


평범한 동네 세탁소이고 외관도 무엇도 새로울 것이 없지만 오래된 아파트 상가의 오래된 세탁소라는 점이 이런 새로운 발견을 하게 해 주었다. 코트는 다음 주 수요일에 완료된다고 한다. 프랜차이즈 세탁소는 문자를 보내주는데 내 전화번호를 안 적었으니 그런 서비스는 없겠지. 그저 오다가다 들르면 되겠지. 단순하게.



내가 남자였다면 글은 훈훈하게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인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노출하는 것 혹은 얼굴과 집 주소를 노출하는 것. 둘 중 어느 경우가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쉬울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세탁소 장부에 내 집 동, 호 수를 적을 때는 멈칫, 했으면서도 그냥 순순히 대고 나왔는데 돌아서서 생각하니 역시 꺼림칙해지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세탁소 아저씨가 범죄자일지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얼마 전엔 코로나 역학 조사를 위해 카페에 적은 명부를 보고 어떤 남자는 얼굴도 모르는 여성에게 문자를 보내 추근거렸다. 그저 여자 이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만큼 여성은 남자가 깨닫지도, 미처 의식하지도 못한 경계를 늘 하고 살아야 한다. 같은 일에도 몇 번이나 나의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 그게 습관이 되어야 한국에서 겨우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국 남성의 범죄율이 말해주지 않는가.

나도 훈훈하게 글을 끝맺고 싶지만 남자가 아니라서 그럴 수가 없다.

다음에는 집을 물어보면 전화번호만 댈 것이다. 아니면 멀어도 프랜차이즈 세탁소에 가야겠지.



(사족)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가을은 일 년에 며칠 되지 않는데,

그 코트 입을 수 있을까? 가뜩이나 코로나 상황에 나갈 일도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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