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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준가 Jun 09. 2017

39일

선흘곶, 동백, 월정리



일어나서 고양이들을 챙기고 간단히 토스트를 만들어 먹었다. 오늘은 서쪽인 저지리의 응마켓 가기로 윗집 언니와 약속을 했는데, 어젯밤부터 언니네 수도가 터져 공사 때문에 잠을 못 주무셨다는 소식이 왔다. 언니가 종일 쉬셔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언니는 가까운 곳이라도 가자고 하셨다. 그래서 가게 된 선흘리. 

선흘리는 동백으로 유명한 동네다. 이름부터 예쁜데 조천리에는 와흘, 대흘, 선흘이 있다. 이 '흘'자는 제주에서 종종 보이는 지명 접미사인데 촌락이나 성읍을 뜻한다. 한자로 착할(좋을) 선(善)을 쓰고 있으니 '좋은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이 '흘'자는 고구려에서 지명에 쓰던 '홀'과 발음이 비슷하다. 그래서 '흘'이 제주어가 북방계(고구려나 부여)에서 왔다는 학술적 설명을 뒷받침해 준다고 한다. 

과연 길가에도 동백나무가 많이 보이고, 동백동산이라는 숲도 따로 조성돼 있다. (들어가 보진 않았다.) 우리가 밥을 먹으러 갈 곳은 선흘곶이라는 식당. '곶'은 보통은 바다로 돌출된 육지를 말하는 용어이지만(호미곶이나 간절곶 등) 제주어에서 '곶'은 숲을 뜻한다. 곶자왈 같은. 그럼 선흘곶은 좋은 마을의 숲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선흘의 숲. (제주에는 카페 그곶이 있고 서울에는 책방 이곶이 있다. 각각 어떤 의미로 '곶'을 쓰는 걸까.)

선흘곶은 쌈밥정식 단일 메뉴를 팔고 있어서 들어가면 인원 수대로 상을 차려준다. 한상 가득 차려진 맛깔스러운 반찬들을 보니 절로 군침이 돌았다. 엄마가 큰맘 먹고 차려준 것 같은 상이다. 음식은 다 맛있었다. 돔베고기도 고등어구이도 양이 좋고, 반찬 하나하나 입맛을 돌게 하면서 깔끔한 맛이었다. 말도 없이 다들 열심히 밥을 먹었다. 다만 약간 신맛이 나는 톳냉국만은 내 입에 맞지 않았다.  

밥을 먹고 선흘곶의 마당을 둘러보았다. 들어오면서 보니 마당이 꽤 큰 규모였다. 마당 안에 연못과 정자가 있을 정도. 마당가를 따라 크고 풍성한 나무들이 자리 잡았고 음식점 건물 옆으로는 카모마일 밭이 있었다. 이 카모마일을 따고 말려서 차로 만들어 팔고 있었는데 그 향이 아주 향기로웠다. 연못은 아주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았는데 한가득 연잎이 떠 있고 연꽃도 발갛게 피어나고 있었다. 음식점 천장에 한가득 걸려 있는 백일홍도 직접 가꿔서 말린 거라고. 과연 선흘의 숲이라 이름지을 만하다. 






특히 아름답다는 카페 세바를 가고 싶었는데 마침 휴무라 카페 동백으로 발길을 돌렸다. 카페 동백은 작은 초원 옆에 지어진 창고형 카페다. 빨간 문부터 매력적이고 내부도 시원시원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카페 밖에 개가 두 마리 있었는데 털이 짧은 백구 한 마리와 털이 긴 검은색 삽살이 계열의 개였다. 백구는 피곤한지 귀찮은지 내내 데크에 누워 있었다. 털이 긴 검은 개가 풀밭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 움직였는데, 깜짝 놀랐다. 뒷다리를 전혀 못 쓰고 앞다리만으로 몸을 끌어 움직이고 있었다. 최근에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너무 안쓰러웠다. 

돌아오는 길에는 월정리에 있는 일루트립에 다시 방문했다. 여전히 풀 냄새와 나무 냄새, 아름답고 비싼 소품들이 가득했다. 나와서 잠깐 월정리 바다 구경도 했는데 젊은 여성 네 명이 몰놀이용 옷을 맞추어 입고 뭔가를 촬영하고 있었다. 근육이 짱짱한 걸로 봐서는 운동 선수들 같았는데, 촬영 세트나 스텝 수를 보면 화보 촬영보다는 뮤직비디오 같은 계열의 영상 같고. 모르는 얼굴들이라 전혀 알 수 없었다. 

약국과 마트를 들러 장을 보고 돌아왔다. 일정이 얼마 남지 않은 데다 이제 매일 나가는 날이 많을 것 같아서 장보는 목록도 점차 간소해지고 있다. 임시로 차렸던 이곳의 살림을 차츰 줄여나가는 중이다. 화장품과 목욕용품도 다 써가고 빈 용기들을 정리한다. 슬슬 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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