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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준가 Jun 28. 2018

베란다 없는 사람들



"달달달달 ------- - - - 삐------ "

표준코스로 돌린 세탁기가 다 돌아가면 둘 중 하나가 일어나 '바람건조' 메뉴를 누른다. 보통은 10분, 이불이나 점퍼 같이 두꺼운 세탁물이라면 20분을 돌린다. 


결혼 전, 잠시 지방의 본가에서 지내며 작업을 하던 남자친구는 결혼 준비를 위해 수도권의 가지시로 올라왔다. 일단 서울(근처)에 터를 잡아야 알바라도 구하고, 결혼 허락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돈을 모아 저렴한 전셋집을 구했다. 남자친구가 먼저 살고 있기로 했다. 결혼을 정확히 언제 할지, 아니 할 수나 있을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일단 시작했다. 우리는 거의 주말에 만났는데 한 주는 남자친구가 서울 우리 집 근처 번화가로 와 데이트를 했고, 다음 한 주는 내가 남자친구가 사는 (정확히는 공동명의로, 내 집이기도 한) 집으로 갔다. 


'임시로' 사는 것이니만큼 변변한 살림살이가 없었다. 남자친구가 상경하면서 본가 작업실의 짐들을 실어왔는데, 대부분 음악 작업에 쓰이는 악기와 책상, 음반, 책 등이었고 살림이라고 할 만한 것은 꼬마 냉장고(냉동고가 따로 있지 않고 위쪽에 조그만 공간뿐이라 신경을 계속 쓰지 않으면 금세 성에가 끼었다)와 옷, 그릇 약간, 대야 정도가 전부였다. 그렇게 뭐가 없었어도 집에서 만나는 날이면 시장을 봐서 함께 요리를 해 먹고 잘 놀았다. 밥 먹고 카페 가는 매일 똑같은 데이트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좋았던 것 같다. 보통의 색다른 데이트라면 교외로 나갈 수도 있고 액티비티를 즐길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런 성향의 사람은 아니다.   


그런 살림이 전혀 불만이 없던 남자친구가 유일하게 힘들어하는 부분이 바로 빨래였다. 손빨래를 하고 짜서 널고 말리고 하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사실 그가 말하기 전에 나는 그게 힘들다는 것조차 인식을 못했다. 나도 그때 손빨래로 내 속옷이나 면생리대를 빨고 있었지만 큰 세탁물은 늘 세탁기가 했으니까. 여하튼 그 말을 듣고 바로 함께 돈을 모아 세탁기를 샀다. 결혼해서도 같이 쓸 거라고 생각해서 이불 빨래도 가능한 13kg 통돌이 세탁기를 골랐다. 드럼 세탁기는 비싼 데다가 세제도 가려야 했고 세탁기 크기에 비해 세탁 용량이 크지도 않았다. 삼성, 엘지 등을 먼저 살펴보았지만 역시 비쌌고 대우가 가장 저렴하면서도 디자인이 나쁘지 않아 그걸 골랐다. 그때 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집을 얻을 때보다 더, 우리가 같이 살게 된다는 '그림'이 그려지게 된 것 같았다. 


그 세탁기를 아직도 잘 쓰고 있다. 세탁기에는 '바람건조' 기능이 있는데 설치 기사가 이 메뉴는 전기를 좀 많이 먹는다고 말해주고 갔다. 일반 건조기처럼 말려주는 건 전혀 아니고, 더운 바람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탈수처럼 통이 계속 돌면서 어딘가에서 바람이 좀 나오는 기능이다. 그래도 바람건조를 하면 빨래가 빨리 마른다. 특히 습한 여름철에는 빨래가 빨리 말라야 한다. 우리 집에는 베란다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 집을 정할 때 이 정도의 가격에, 크기, 방이 두 개라는 점에 만족했다. 베란다가 없다는 게 무슨 불편을 가져올지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우선 베란다가 없다는 건 빨래를 널 곳이 없다는 뜻이었다. 빨래를 안방이나 부엌 등 생활공간에 널어야 했다. 안 그래도 좁은 집에 빨래 건조대를 활짝 펴놓으면 그야말로 집은 더더욱 좁아졌다. 아니 좁은 것도 문제고 보기 싫은 것도 문제지만 가장 문제는 빨래가 안 마른다는 점이다. 비라도 오면, 아니 장마철에는 빨래는 며칠 동안 널어 두어도 마르지 않았다. 대신 집안에는 꿉꿉한 냄새가 떠다녔다. 비가 그치면 살짝 마르다가 비가 내리면 그 습기를 빨래가 다시 흡수했다. 못 견디던 어느 날은 지인이 선물해준 소형 제습기(정말 작다)와 선풍기를 틀어놓고 빨래를 안방에 둔 다음 몇 시간 동안 문을 닫아두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빨래를 말릴 수가 없었다. 쨍쨍한 햇볕 아래 말린 뽀송한 빨래를 이 집에 사는 내내 나는 가질 수 없다. 최근에는 다들 건조기를 많이 사던데, 이 집에는 건조기를 따로 들일 만한 공간이 없고, 우리는 그걸 살 돈도 없다. (당연히 건조기의 뽀송함과 먼지 제거 기능을 체험하고 싶다. 건조기 갖고 싶다.) 


베란다가 없다는 건 또한, 창고로 쓰일 공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각종 청소도구며 한동안 쓰지 않을 짐들, 이사올 때 생긴 가구의 부속물 등 버릴 수는 없는데 생활공간에 두긴 힘든 것들을 모두 훤히 보이는 집안 어딘가에 두어야 했다. 최대한 구석으로 밀어 넣거나 장에 넣거나 천으로 가려 두었지만 한계가 있다. 이 모든 보기 싫은 것들을 베란다 한 켠에 보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둔 다음 천을 두르거나 가림막을 세우면 좋을 텐데. 이 집에 사는 이상 나는 이렇게 짐을 이고 지고 살아야 한다. 


하나 더 꼽자면 베란다가 없다는 건 외벽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베란다로 낼 공간 없이 바로 부엌이고 방이기 때문에 외부의 찬 기운과 더운 기운도 고스란히 사람이 겪어야 한다. 완충 지대가 없는 집은 늘 다른 곳보다 혹독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빌라 건물에서도 가격이 저렴한 우리 집과 바로 옆집을 제외하고는 베란다가 있었다. 그래, 베란다는 꼭 필요한 거였어. 베란다가 이렇게 삶의 질을 좌우할 줄이야. "다음에는 우리 꼭 베란다 있는 집으로 가자." 이 말을 몇 번이나 룸메와 나누었다. 베란다를 예쁘게 꾸미고 화단도 만들고 그곳에 테이블과 의자를 두고 가끔 나가 볕을 쬐는 여유로운 그림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베란다의 실용적 기능 때문에 베란다를 갖고 싶다.  


이렇게 불편해도 나는 이 집이 고맙다. 결혼해서 5년, 결혼 전부터 치면 6년 이상을 보증금 한번 올리지 않고 살았다. (사실은 재개발 예정지이기 때문인데, 재개발은 아직도 시작되지 않았다.) 돈도 없고 확신도 없었던 우리가 이 집에서 하나씩 살림을 꾸리고, 어느덧 안정된 커플로 살아가고 있다. (경제가 안정되지는 않았고 관계가 안정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신상에 큰 변화가 생기거나 쫓겨나기 전까지는 계속 살 것 같다. 그때까지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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