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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준가 Aug 05. 2018

더위 샌드백이 있다면



'더위'라고 붙여 놓은 샌드백이 있다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있는 힘껏 주먹질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샌드백은 아무리 세게 쳐도 제자리로 돌아온다. 지금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아무리 더위를 욕하고 저주해도 이 더위는 매일매일 우리를 덮친다.  

1994년의 기록적인 폭염을 넘어서버린 2018년의 더위. 110년 만의 더위라는 말은 110년 전 어느 날 이보다 더 더웠다는 뜻이 아니라,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덥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런 더위 처음이라고. 




나는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대신 추위는 덜 탔다. 어른들은 겨울에 태어난 애들이 그렇다고 말해주곤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마치 내 혈액형이나 별자리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낭만적인 기분으로 '겨울에 태어난 아이'라는 말을 즐겼다. 정작 엄마는 나는 낳을 때 수술실이 너무 추워서 덜덜 떨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다시 돌아와서, 안 그래도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 종일 집에서 열 나는 컴퓨터 앞에 있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도 에어컨 없이. 재작년의 내가 그랬다. 선풍기와 아이스팩으로 버텨가며 윙윙 돌아가는 데스크톱 앞에서 월간지 마감을 했다. 다른 일감은 카페로 갖고 나가 할 수도 있지만 조판까지 해야 되는 일감이라 간단한 문서 작업처럼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지냈더니 더위를 먹어서 몸이 이상해졌다. 열이 났다가 추웠다가 어지러웠다가 설사를 했다가, 얼굴엔 붉게 열꽃이 피었다. 룸메의 작업실은 방음 시설 때문에 거의 밀폐된 공간이어서 들어갈 때부터 설치된 에어컨이 있었다. 룸메는 퇴근해서 더위에 지친 나를 볼 때마다 미안해 어쩔 줄 몰라했다. 다음 해, 그러니까 작년에 우리는 여름이 다가오자 바로 에어컨을 샀다. 


에너지효율 1등급의 인버터 에어컨을 샀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건 벽걸이라도 70만 원이 넘었다. 하이마트 온라인몰에서 40만 원짜리 벽걸이 에어컨을 샀다. 에너지효율 5등급, 정속형 에어컨. 4개월인가 5개월 할부. 작년에 이걸 사고 아주 신나 했었다. 선풍기를 틀고도 더운 날이면 에어컨을 켰다. 내 작고 어두운 방에 에어컨이 달리니 이보다 쾌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너무너무 더운 어느 날은 안 쓰던 이불을 꺼내 겹쳐 깔고 에어컨 달린 작은 방에서 잠을 잤다. 안방의 침대 위에서는 서로 손을 잡기도 힘들었지만 에어컨이 있는 방에서는 껴안을 수도 있었다. 에어컨을 산 뒤로 아이스팩을 수건에 둘둘 감싸서 안고 있는 일은 없었다. 작년 여름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정말 정말 못 견디게 더운 날은 그렇게 많지 않았어. 그래도 그 며칠을 못 견디겠으니까 에어컨이 필요한 거야. 삶의 질을 확 높여 주잖아." 

이 말도 올해는 폐기다. 올해부터 에어컨은 필수 가전이다. 예를 들면 세탁기처럼. 작년에 에어컨을 틀던 시기의 전기요금은 4만 원 후반 대였다. (온수매트를 쓰는 한겨울을 제외하고 평소에는 1만 원 내외다.) 지금은 에어컨을 끄는 시간이 거의 없다. 


일어나면 간단한 요리를 해서 먹는데 불을 쓰면 못 견디게 더워지기 때문에 잠깐씩 에어컨 앞으로 가서 한숨 돌린다. 룸메가 출근하고 나면 나는 내 방에서 데스크톱 앞에 앉아 일을 한다. 잠깐 도서관이나 시장에 다녀오는데 그동안은 에어컨을 끌 때도 있고 그냥 켜놓을 때도 있다. 운동을 갈 때는 끈다. 인버터 에어컨은 중간에 끄는 게 오히려 전기를 많이 잡아먹는다는데 내 방의 에어컨은 정속형이라 켜면 켜는 대로 전기를 먹는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에어컨을 켜고, 룸메가 돌아오면 요리를 해서 같이 밥을 먹고 넷플릭스를 보며 쉬다가 또 에어컨 있는 방에 이불을 펴고 잔다. 자는 동안 추워서 깰 때도 있다. 그러면 에어컨을 끄고 선풍기만 켜놓고 다시 잔다. 그러고는 곧 다시 더워져서 에어컨을 켜고... 


더위가 계속되니 요리를 하는 데에도 요령이 늘었다. 가급적이면 전자레인지나 전기밥솥을 이용하는 것이다. 작은 닭을 사서 밥솥에 넣고 백숙을 해먹은 다음, 그 국물에 쌀을 갈아 넣고 다시 밥솥을 돌려 닭죽을 만든다. 레인지용 찜기에 달걀을 넣고 돌려서 삶은 달걀을 만들거나 역시 밥솥에 달걀을 넣어 돌려 구운 달걀을 만들기도 한다. 레인지에 끓여 먹는 라면도 있고, 최근에는 등갈비김치찜도 밥솥을 돌려 만들었다. 국수를 삶거나 채소를 데치는 등 꼭 불을 써야 할 때는 일단 전기포트에 한가득 물을 끓여서 그 물을 냄비에 옮인 뒤 바로 불을 켜 삶는다. 가스불 켜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물도 빨리 끓일 수 있어서 좋다.   


이번 달 전기요금이 무섭다. 과연 얼마나 나올까? 누진세는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까. 정부가 이번 폭염을 '자연재해'로 규정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기간 동안 누진세를 확 낮추는 방안은 어떨까? 우리는 다행히 에어컨이 있지만 에어컨이 없는 집도 많다. 저소득층에게 저가형 에어컨 구매 비용을 지원해주는 방안은 어떨까? 이게 자연재해라는 걸 인정한다면 대책도 세워줘야 하지 않은가. 콩알만 한 에어컨이라도 좀 팍팍 틀고 싶다. 실제로는 끄지 못하고 팍팍 틀고 있지만 마음이 불안하다. 에어컨은 이제 사치제가 아니라 필수재다. 




어제는 시장에 가서 바로 튀겨주는 돈가스 두 장을 사 왔다. 등심 돈가스 한 장에 2500원인데 그리 크지는 않지만 맛은 괜찮다. 그 가게에서는 꽈배기도 팔고 핫도그도 판다. 주인아저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튀김기 옆에 서 있었다. "가게 앞으로 한 발짝만 나가도 살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돈가스를 종이봉투에 담아주었다. 남의 땀으로 갓 튀긴 돈가스를 먹으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장 상인들도 많이들 휴가를 갔다. 다들 맘대로 휴가라도 갔으면 좋겠다. 이 더위에 갇혀서 땀범벅으로 시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에게 간절하게 기도해 본다. "제발 모든 집에 에어컨을 설치해 주세요. 콩알만 한 거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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