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답했다> - 준가의 글 1
어렸을 때부터 꿈을 유독 잘 꾸는 편이었다.
특히 앞으로 일어날 상황들에 대한 꿈을 자주 꾸었다.
소풍을 가는 날 아침이나 전날에는 이미 꿈속에서 소풍을 갔다. 현실과는 미묘하게 다르고 이질적인 소풍이었다. 꿈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꿈에서 깨고 나면 '진짜가 아니라 다행이다' 라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기억만은 생생하다. 석사 논문 발표를 하는 날 며칠 전부터 꿈에서 발표를 숱하게 했다. 어찌나 많이 했던지, 실제 발표날 끝나고는 오히려 이것이 꿈인가 싶었다. 일정으로 조금 긴장되는 날이면 아침에 샤워를 하는 꿈을 꾼다. 아침에 꿈에서 샤워를 한 후 깨고 나면 일어나서 또 샤워를 해야 하는 것이 억울해질 때도 있었다. 나는 이미 너무 깨끗한데.
완벽하게 보냈으면 좋겠다는 커다란 기대가 만들어낸 긴장이 꿈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잘 못하면 어떡하지' '망하면 어떡하지' 항상 불안했다. 행동의 근간이 되는 불안은 빠른 행동력과 퍼포먼스를 선물해주었지만 동시에 허무함도 주었다.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일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 현재의 나에게 써줄 힘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앞만 내다본 채 불안함에 쫓겼다.
짧은 만남과 긴 헤어짐이 주 패턴인 장거리 연애를 지속한 지 4년이 넘었다. 가뜩이나 불안한 나에게 긴장과 불안함을 증폭시키는 최적의 연애 패턴이었다. 마치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만남에는 꼭 끝이 있었다. 긴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순간을 가장 좋아하는 나지만, 어쩐지 연애에서 만큼은 끝이 그리 달갑지 않다. 어느덧 장기전이 되어버린 코로나로 인해 1년 반의 시간을 떨어져 지냈다. 마침내 지난여름, 3주간의 만남을 가졌다. 그리 길지는 않은 시간. 평소보다 더 소중하고 어려운 만남을 해냈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온갖 것을 쏟아부어 잘 지내고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핀란드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아직 시간이 반도 흐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복받쳤다.
'헤어질 때 또 슬프겠지. 한동안 또 적적하겠지.'
''큰 행복을 누렸던 만큼 다가올 커다란 상실감. 그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을 생각에 머리가 지끈해졌다.
4년 정도면 쿨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싶지만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감정도 있기 마련이다. 눈물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이 뚝 떨어질 때쯤 욘이 말했다.
"Just focusing on now"
그때 슬픔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나중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느라 지금의 행복을 작게 느끼지 말자고.
함께하고 있는 이 순간과 함께 밥을 먹는 이 시간에 몰두하자고.
그래. 네 말이 맞아.
너무 많은 걱정들로 인해 지금 이 순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있는 공간은 여기고 함께 숨을 쉬는 사람은 앞에 있고, 존재하는 순간은 지금이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은 지금을 견디면 언젠가는 더 큰 행복함이 오겠지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 기대가 현재의 소소한 행복들을 잡아먹고 있는 채도 모른 채. 아, 나는 결국 너무 내다보느라 불안했고, 내다보느라 흔들렸구나.
의식의 축을 미래에서 오늘로 가져오기로 했다. 오늘 나는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뭐가 맛있었는지 어떨 때 기분이 좋았는지 세세하게 쪼개 보기로 했다. 하나씩 작은 행복들을 더 많이 발견하다 보면 내다보며 불안할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그렇게 만족된 하루를 살고 만끽하면 내일이 와도 나는 작은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도 있겠다.
흐린 날씨에 마시는 따뜻한 커피.
계절의 흐름을 알려주는 색과 냄새.
햇빛이 찬란한 어느 날에 하는 산책.
살짝 쌀쌀한 날과 어울리 인센스의 매캐한 향.
운동을 끝내고 마시는 맥주(및 알콜성 음료들).
내가 현재를 느끼며 좋아하는 순간들이다.
아직도 꿈을 자주 꾼다. 그러나 샤워를 하는 꿈은 꾸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꿈에서 샤워를 하는 대신 아침에 직접 따뜻한 물을 맞아보곤 한다.
수증기가 주는 촉촉함과 은은한 샴푸향을 즐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