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점심으로 순댓국을 먹었다. 가끔 들르는 집인데, 점심 피크 시간이라 근처 빌딩 공사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로 북적거렸다. 아침을 걸러서 특으로 주문했다. 사골국물이 진했고, 특 사이즈답게 고기도 많았다. 깍두기는 적당히 잘 익었다. 밥을 다 먹고 밖으로 나왔다. 아주 약간 바람이 불었지만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다. 식당을 나와 길을 걸었다.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 그냥 밥을 먹고 나면 좀 걸어야 할 것 같았다.
만지면 꽃이 부러져요 라는 강력한 경고문을 붙여놓은 꽃집 앞을 지났다. 꽃집의 영향을 받은 건지 알 수 없지만 산세베리아라는 이름의 카페도 지나친다. 카페 이름과 내부 분위기가 사뭇 달라 보인다. 브랜드는 이름에서 시작해서 이름으로 끝난다는 말이 떠올랐다.
조금 걷다 보니 작은 김밥집 앞이다. 입구 옆 간판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여기 맛있는 김밥 있어요
정갈한 명조체로 쓰인 짧은 문장이었다. 지나치려다 한 컷 담았다. 카피라이터로서 메시지가 이렇네 저렇네 하려는 건 아니었고, 오랫동안 홍보해 온 빛바랜 시간이 간판에 보여서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나이가 적으나 나이가 많으나, '어떤 상황이든 어떤 사람에게든'이란 수식이 문장 앞에 생략된 걸로 느껴졌다. 가게 안을 슬쩍 들여다봤다. 옹기종기, 소곤소곤. 김밥집이 다 그럴 테지만, 수줍게 서있는 짧은 입간판은 "최고의 김밥"도 아니고, "100% 수제 김밥"도 아닌 그냥 "여기 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흔한 과장도 없다. 유기농, 프리미엄, 특제 레시피 얘기도 없다. 그저 '여기'와 '맛있는' 두 단어로만 돌돌 말은 담백한 김밥 같은 광고판이었다. 그냥 '여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자신감 같기도 했다. 욕심내서 이것저것 넣지 않은 깔끔하고 심플한 메시지다.
조금 더 걷다가 붕어빵 가게를 만났다. 간판 제목은 "추억의 잉어빵" 그렇게 적혀 있었다. 추억. 참 이상한 단어다.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없어도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끔은 어떤 것들은 추억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다. 붕어빵이든 잉어빵이든 무쇠 틀에서 찍어내는 빵은 죄다 추억과 관련이 있다. 유명 프랜차이즈 빵집이나 대형 베이커리 카페의 빵들과는 달리 제조과정도 리얼하고 매대도 적나라하다. 모든 추억을 떠올려보면 이렇게 세련되진 않았지만 따끈하고 달콤한 장면들 아니었을까.
2천 원에 3개. 그야말로 팥 반, 고기 반처럼 보기에도 실해 보였다. 작은 봉투에 담긴 빵에서 김이 올라왔다.
한 입 깨물었다. 입천장이 살짝 데었다. 잉어빵은 이렇게 먹어야 국룰이라고 했던가. 그런데도 맛있었다.
잉어빵은 한입에 사라지지 않는다. 천천히 씹어야 한다. 팥이 터지고, 반죽이 눅눅해지고, 그러면서 혀에 익숙한 단맛이 퍼진다. 그러고 보니, 겨울이 끝나갈 때쯤이면 늘 잉어빵을 사 먹었던 것 같다. 꼭 먹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냥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세 개 중 한 개를 더 먹고, 나머지는 들고 걸었다. 봉투 안에서 빵이 조금씩 식고 있었다.
두 번째 잉어빵이 사라질 즈음, 코너를 돌자 도어록 몇 개가 건물 앞 계단에 놓여 있다.
누군가 떼어낸 것들 같았다. 삼성, 게이트맨 로고들이 보일락 말락 오랜 세월 쓰임의 흔적을 가까스로 보여주고 있었다. 중고도 아니었고, 이제 한물 간, 정년퇴직한 사람들처럼 다들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문을 지키던 것들일 것이다. 누군가의 손에 매일 닿았을 것이다. 문을 열고 닫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 제 역할을 다하고 길거리로 나왔다. 도어록이란 게 그렇다. 있을 때는 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없어지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대체품이 오고, 새로운 버튼이 눌리고, 그러다 낡은 것들은 창고 한구석에 밀려나거나 이렇게 길가로 내몰린다. 나는 멈춰 서서 잠시 동안 도어록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도 예외 없이 쓰임을 다하면 저렇게 되겠지.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회장의 인터뷰 중에 종종 인용되는 내용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10년 후에 무엇이 변할까?"를 고민하지만, 그는 "10년 후에도 변하지 않을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인사이트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비즈니스 전략은 변하지 않는 것 위에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아마존에서는 "고객이 낮은 가격을 원한다, 빠른 배송을 원한다, 다양한 선택지를 원한다"는 사실은 10년 후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아마존은 변하는 트렌드보다, 이 변하지 않는 요소에 에너지를 집중한다. 고객이 "가격이 더 비쌌으면 좋겠어요." "배송이 더 느렸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할 일은 없으니까.
광고, 브랜딩, 콘텐츠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어떤 브랜드는 빠르게 유행을 타고 사라지지만, 어떤 브랜드는 오랫동안 사랑받는다. 변하지 않는 가치(진심, 신뢰, 편리함 등)를 기반으로 한 브랜드는 오래간다. 사람들은 감동적인 이야기, 공감을 주는 브랜드,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서비스에 항상 끌린다. 그러니까 광고를 고민할 때도 단기적인 트렌드가 아니라, "사람들의 변하지 않는 본질"을 중심에 두고 있어야 한다.
개인적인 삶에서도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10년 후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여길 것은 무엇인가?" "10년 후에도 꾸준히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변하지 않는 본질을 담고 있는가?" "단기적인 유행을 좇는 것보다, 본질적인 가치를 찾아서 꾸준히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순댓국 먹고 산책하다가 그리 대단한 인사이트를 얻은 건 아니지만 굳이 사진들 하나하나에 의미부여를 해보자면 이렇다.
1) 김밥집 간판은 변하지 않는 솔직함을 "여기 맛있는 김밥 있어요."로 압축했고 사람들은 언제나 간단하고 직관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것. 2) 잉어빵은 계절이 변해도 다시 돌아오는 익숙한 맛이고 겨울이면 다시 찾게 되는 변하지 않는 감각이라는 것. 3) 도어록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는 것이고 어떤 것들은 새것으로 대체된다는 것.
어떤 것들은 사라지고, 어떤 것들은 남는다. 김밥집 간판은 내일도 거기 있을 것이다. 잉어빵 가게는 봄이 오면 사라질 것이다. 도어록들은 아마 누군가 치울 것이다. 천천히 걸으며 식은 잉어빵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식었지만 따뜻했다. 그리고 아마 내년 겨울에도, 10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순간을 마주하셨나요? 어떤 것은 그대로이고, 어떤 것은 변해갑니다. 그 속에서 당신이 발견한 오늘의 PICK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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