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견디는 공간과 브랜드에 대한 단상
성수동은 요즘 서울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동네 중 하나다. 오래된 공장지대는 트렌디한 카페와 팝업 스토어로 바뀌고, 하루가 다르게 간판이 바뀌는 골목들이 생겨난다. 그런 동네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던 시래깃국집이 있었다. 정해진 자리에, 정해진 맛. 간판은 낡았지만 익숙했고, 철제 의자와 시래깃국 향이 반가운 그런 공간이었다.
지난 주 간만에 점심을 하러 들렀다. 눈에 익은 골목길을 들어가 문을 여는 순간! 이모님들 대신 매니저로 보이는 여성이 내게 인사를 한다. 순간 당황했다. 그 자리는 바뀌어 있었다. 무채색 조명의 팝업 패션 매장. 다양한 의류가 걸려있는 진열대 사이로는 국물이 아닌 향수가 흐르고 있었다. 간판도, 이모님도, 오래된 냉장고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곳은 내게 ‘있어야 하는 곳’이었다.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장소, 사라져서야 의미를 깨닫게 된 공간. 그 식당은 단지 음식을 파는 곳이 아니라, 일상 속 작은 위로를 주던 곳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본가에 갔다가 사전투표를 마치고 어릴 적 살았던 골목길을 걸었다. 혹시나 해서 기억을 더듬으며 추억 속의 집을 찾아봤다. 놀랍게도 그 집은 그대로 있었다. 페인트는 벗겨졌고, 우편함은 녹슬었지만 현관의 구조와 창틀은 예전 그대로였다.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최근의 공간은 사라졌고, 오래된 공간은 남아 있었다. 시간은 앞으로 흐르는데, 감정은 과거의 특정한 순간에 고정된 채 떠오른다.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 그 차이엔 기능이 아니라, 감정이 있었다.
오래된 가게에 가보면 ‘since 1983’ 같은 문구가 붙어 있다. 어떤 특별한 마케팅 없이도, 맛이 특별하지 않아도, 그 시간만으로도 경외감이 든다. "이 집은 뭔가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맛 때문일까? 가격 때문일까? 아니다. 그건 바로 시간을 견뎌온 태도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그 수많은 계절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건 단순한 운영이 아니라 ‘존재력’이다. 사람도, 공간도, 브랜드도 — ‘지속’ 그 자체가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은 익숙한 브랜드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어느 날은 혜성처럼 나타난 브랜드가 트렌드를 휩쓴다. 예를 들어, 한때 전국을 휩쓸던 VIPS, TGIF, 미스터피자 같은 브랜드는 지금 거의 자취를 감췄다. 반면 마켓컬리, 우아한 형제들, 뉴닉, 에이바자르 같은 브랜드는 단숨에 '일상 속 고유명사'가 되었다.
‘맛’이 아니라 ‘태도’,
‘기능’이 아니라 ‘기억’이 사람을 움직인 것이다.
기억은 기능보다 오래가고, 감정은 성능보다 오래 남는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제품이 아니라, 그 브랜드가 남긴 태도다.
시래깃국의 깊은 맛보다, 그 자리에서 나눴던 대화의 분위기가 더 또렷하게 기억된다. 성수동의 골목은 계속 바뀌지만, 내 안에 남은 풍경은 오히려 오래전 것들이다. 시간은 언제나 앞으로만 흐르지만, 기억은 뒤로, 더 뒤로, 내가 감정을 느낀 시점으로 되돌아간다. 사라진 공간, 사라진 브랜드, 사라진 누군가. 그 모든 것엔 공통점이 있다. 기억이 그걸 되살린다는 것. 그리고 기억은 늘 감정의 흔적을 따라간다는 것. 우리가 오래 기억하는 건 특정 시점의 온도다.
기억은 말없이 속삭인다.
“그때 참 좋았어”
"그 가게 참 정겨웠지"
"그 브랜드는 괜찮았어"
이런 한마디가, 어쩌면 그때 그 국물, 그 자리, 그 기억, 그 브랜드가 남길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유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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