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후 스벅에 들렀다. 난 차든 커피든 무조건 따뜻하게 마신다. 한여름 폭염이든 개의치 않는다. 뚝섬역, 오늘 38도다. 뜨거운 민트 블렌드티를 주문했다. 디카페인 프리. 익숙한 테이크아웃 컵이 보인다. 뜨거운 물에 티백만 넣으면 되니까 주문 후 곧바로 나온다. 하얀색 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1분여 시간이 지나 티백을 건져내고 한 모금 마셔본다. 다시 뚜껑을 닫는다. 늘 보던 컵, 익숙한 뚜껑. 그런데 오늘따라 뚜껑 위 작은 구멍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는 아무 의미 없이 지나쳤던 존재. 존재라고 하기엔 너무나 작은 홀이다. 바늘구멍보다도 작아 보인다. 하찮아 보여서 눈에 띄지도 않을 크기다. 무슨 일인지 그 하찮고 사소한 구멍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뜨거운 차를 마시려면 내 허락을 받아야 해 하는 식의 존재감이었을까.
‘이 구멍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괜한 궁금증이 생겼다. 뭐 그까짓 거 없다고 무슨 일 있겠어? 오산이다. 숨구멍 만한 사이즈지만 과학이다.
압력이 차서 뚜껑은 부풀고, 마시는 순간 커피나 차가 넘치거나 튈 것이다.
작은 구멍 하나가, 보이지 않게 큰 균형을 잡고 있었다. 세상에 하찮은 것 투성이일 텐데 각각의 존재가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있다니. 흥미롭고 신기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이 구멍은 단순한 기능 이상이다. 한 모금 마실 때, 뜨거운 김이 살짝 빠져나오는 그 순간.
커피의 온도는 적당히 식고, 마시는 사람의 마음도 편안해진다. 작은 구멍 하나가 ‘숨통’을 트여주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보이지만 보이지 않는다), 분명하게 존재하는 이 역할이 왠지 위로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종종 커다란 문제, 화려한 해답에만 눈을 돌린다. 당장 제출해야 하는 제안서, 오늘 연재해야 하는 브런치 글(브런치북 2개를 욕심내서 동시다작으로 하는 중), 거창한 상반기 하반기 목표들, 끊임없이 위로하며 가야 할 관계들. 하지만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건, 의외로 이런 작은 구멍 같은 존재라는 걸 짧은 점심시간에 발견하고 말았다. 바쁜 하루 중 잠깐 차를 마시며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 아무렇지 않게 지나친 것에서 ‘숨구멍’을 발견하는 순간. 이런 작은 틈이 있어야 버틸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난 차를 마실 때 자주 흘리는 편이라 그런 면에서 굉장히 고귀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찮은 구멍하나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했나 모르지만 나에게도 그런 숨구멍들이 있다.
거창하지도 않다. 누구나 들이마시는 호흡 같은 시간들이다.
요즘 나만의 숨구멍은 세 가지다.
하나는 자기 전, 폼롤러 스트레칭이다. 아침 헬스를 하는 루틴이라 하루 종일 몸이 뻐근할 때가 있다. 긴장된 몸을 풀어주는 시간. 몇 분만 굴려도 굳어 있던 근육과 마음이 풀린다.
두 번째는 저녁 뉴스 보며 잠깐의 퍼팅 연습이다. 퍼팅매트 위에서 가상의 홀을 향해 공을 굴리다 보면, 잡념도 함께 굴러간다. 작은 성공의 소리 ‘톡’이 하루의 마침표가 된다. 그래봐야 겨우 10분이다.
세 번째 숨구멍은 저녁 식사 후 20분 산책이다. 천천히 걷는 동안, 오늘의 피로가 내려앉는다(이건 매우 가식적인 해석일 것 같다). 주목적은 식후 소화 때문이다.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면 얼추 속이 편안해진다.
대단한 발견도 통찰도 아니다.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눈에 스쳤을 녀석이다.
삶의 의미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알아차림이 주는 소소한 교훈은 있어 보인다.
모든 걸 꽉 조이고 달리기만 하면 어느 순간 버거워지니까
각자 숨구멍 하나, 작은 여유 하나쯤 가지면 조금은 일상의 밸런스가 잡히지 않을까.
뭐 이 정도 아닐까 싶다. 커피 뚜껑의 작은 구멍! 작은 틈에서 일상의 호흡을 되찾는 세상 가벼운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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