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에서 ‘선방했다’는 말은 주로 숏게임에서 나온다. 오늘은 티샷도 안되고 아이언도 안되서 망할 뻔 했는데 그럭저럭 선방했어. 비도 오고 바람도 불어서 힘들었는데 나름 선방했어. 너무 더워서 기진맥진 피곤했는데 그나마 숏게임으로 좀 막았어. 선방은 이렇게 대부분 매홀의 마지막 과정인 경우에 해당된다.
그렇게 선방한 홀이 쌓여 베스트는 아니지만 받아들일만한 스코어를 만들어 준다.
'퍼터로 선방했다.'
'어프로치로 선방했다.'처럼
드라이버나 아이언으로는 선방이란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롱게임 즉 드라이버와 아이언은 공격의 언어에 가깝다. 선방은 어디까지나 롱게임이 무너졌을 때, 그 무너진 도미노를 막아주는 마지막 방어선 같은 말이다. 그러니까, 원래 계획은 틀어졌지만 나름의 무기 하나로 버텨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마추어는 매일 같은 코스를 플레이해도 매일 다른 스코어를 만든다. 똑같은 코스라도 매샷의 위치가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매 라운드를 베스트로 마칠 수는 없다. 골프장은 그런 걸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방했다’는 말은, 무너지지 않는 둑 같은 든든한 자산을 가리킨다.
나도 자주 그런 선방을 경험한다. 티샷은 언덕 어딘가로 사라지고, 세컨샷은 잘못 맞아 그린에 훨씬 못 미쳤을 때, ‘아, 오늘은 망했구나’ 싶은 순간들. 그런데 어프로치가 그린 옆 러프에서 부드럽게 굴러가 홀 옆에 붙는 순간 그 ‘망했다’는 생각이 뒤집힌다. 퍼터로 톡. 동반자들의 인심이 후하면 오케이 파다. 그때 입안에 번지는 미묘한 단맛은 버디를 기록한 맛과는 또 다르다. 살아남았다는 맛이다. 선방에는 묘한 온도가 있다. 이기진 못해도 진 건 아니라는 위안. 게임을 지켜냈다는 작은 자부심. 그리고 다음 홀에서 다시 어깨를 펴게 만드는 힘.
그래서 나는 숏게임을 좋아한다. 집중해서 연습한다, 아마추어 대부분은 롱게임에 집중한다. 시원시원한 맛이 있다. 자기만의 스윙이 점점 만들어지면 계속 확인하고 싶어진다. 연습시간의 거의 전부를 드라이버와 아이언에 할애하고 만다. 물론 그럴 시기도 필요하다. 티샷 미스를 줄여야 하니까. 하지만 티샷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된 단계에서는 숏게임에 집중해야 한다. 드라이버와 아이언이 미스를 해도 만회할 기회는 숏게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숏게임은 보험이다. 마지막 보루다. 잘하면 파도 가능하고, 그 이상의 대량 실점을 막아준다. 공격은 화려하지만, 방어에는 그 사람의 내공이 묻어난다. 드라이버는 스윙이 좋으면 잘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숏게임은 스윙과 상관없이 '해내야 한다'. 바람, 잔디결, 거리, 라이… 모든 변수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답을 찾아내는 게 숏게임이다.
생각해보면 일상에서도 선방의 순간이 있다. 회의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날아올 때, 잘 준비한 화려한 프레젠테이션 대신 짧고 단단한 한 문장으로 분위기를 바꿔버리는 것. 급하게 보낸 메일에 오타가 있어도,
상대가 의도를 알아차릴 만큼 정중하게 다시 쓰는 것. 혹은 오늘 하루를 완벽히 살진 못했지만, 저녁에 좋아하는 음악 한 곡을 들으며 하루를 잘 마무리하는 것. 이런 건 모두 일상의 숏게임이다.
가끔은 일상이 골프의 18홀 같다.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날이 드물다. 그럴 때 필요한 건 ‘한 방의 역전’이 아니라 ‘선방’이다. 회의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이 들어왔다. 머릿속은 하얘졌지만, 손끝은 펜을 놀려 큰 그림을 그렸다. 숫자는 기억나지 않아도 흐름은 살려냈다. ‘아, 오늘은 여기서 무너지지 않았네.’ 그게 선방이었다. 저녁에 손님이 오기로 했다. 파스타 소스가 짜졌다. 순간 허둥대며 냄비에 우유를 부었다. 채소를 썰어 넣어 간을 낮췄다. 완벽한 맛은 아니었지만, 웃음과 분위기는 살려냈다. 그 순간, 음식은 요리가 아니라 방어전이 된다. 비 오는 날, 우산을 깜빡했다. 하필 양복 바지. 그런데 50미터 앞에 지하상가 입구가 보인다. 뛰었다. 다리는 젖었지만 어깨는 무사했다. 어쩌면 그건 하루 전체를 바꿔놓는 작은 선방이었다.
가족 모임에서 어색한 공기가 돌았다. 누군가의 무거운 한마디가 식탁 위에 내려앉았다. 그때 불쑥 튀어나온 농담 하나. 웃음이 퍼졌다. 누군가는 그걸 눈치라고 부르지만 나는 감정의 파도 앞에 둑을 세운 순간이라고 부른다.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았다. 수치는 경계선에 걸렸다. 몸이 마지막 경고를 보낸 셈이다.
“이번엔 봐줬다. 하지만 다음번엔…” 그 한 줄이 나를 다시 걷게 하고 뛰게 만든다. 선방은 멋진 드라이버 피니시처럼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쌓이면, 무너지지 않는 둑이 된다. 인생의 라운드에서 우리는 종종 ‘잘했다’보다 ‘버텼다’라는 순간으로 구해진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우리를 앞으로 밀어준다.
무너지지 않게 막아주는, 나만의 둑 같은 것들. 골프에선 퍼팅을 포함한 숏게임이 그렇다. 골프든 삶이든 ‘완벽한 하루’라는 건 거의 오지 않는다. 대신 ‘무너지지 않는 하루’를 만드는 법을 조금씩 알게 된다. 나는 그걸 '선방'이라 부른다. 그게 쌓이면 이상하게도 좋은 날이 더 자주 찾아온다.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생각한다. 골프에서 그리고 삶에서 공격보다 중요한 건 선방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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