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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샷은 오늘의 나를 속인다

by 언덕파

골프에서 '라베'라는 표현이 있다. 라이프 베스트. 생애 가장 좋은 스코어를 말한다. 골프에서 우린 늘 가장 좋았던 장면을 떠올리곤 한다. 가장 멀리 보냈던 거리, 홀에 가장 가까이 붙였던 거리, 환상적으로 트러블을 탈출했던 상황. 누구나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억이 하나쯤 저장되어 있다. 기억의 외장하드에 저장된 장면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퍼올려져 오늘의 기대감을 갖게 한다.

골퍼들은 늘 베스트를 경험한 후 그 기세를 이어갈 거라고 믿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제는 잘 맞았다. 드라이버는 똑바로 뻗었고, 아이언은 잔디를 스치듯 가볍게 깎여나갔다. 어프로치는 자석처럼 핀에 붙었고, 퍼팅은 짧지도 길지도 않게 홀컵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어제의 나에게 고마웠다. 잘 맞은 샷들이 하루의 기분을 다 바꾸는 날이었다. 샤워하며 자책하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기분이 좋아서 괜히 연습장 어플을 켜봤다. 어제의 내 샷은 아직 내 안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어제의 또는 며칠 전의 샷을 떠올리며 티박스에 섰다. “어제처럼만 또는 그때처럼만 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부터 이상했다. 스윙은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셋업도 같고, 루틴도 같고, 볼도 똑같은 브랜드였다. 하지만 볼은 어제처럼 날아가지 않았다. 페어웨이를 가로질러 벙커로 굴러가는 볼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한다. “똑같이 쳤는데 왜?” 아니다. ‘똑같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착각이고, 망상이며, 아주 인간적인 기대일 뿐이다. 골프는 그런 게임이다. 조금 더 자고, 조금 더 걷고, 다른 공기를 마시고, 다른 마음을 안고 오늘을 시작하는 게임이다. 몸은 어제보다 무겁고, 바람은 다르고, 뇌는 어딘가 다르게 반응한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나는 어제의 스윙을 반복하려고 했다. 그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공식이다.


우리는 늘 기억에 속는다. 어제의 샷이 좋았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억은 그 샷을 자꾸 미화시킨다. ‘그때 드라이버는 정말 예술이었지.’ ‘8번 아이언은 딱 130m를 벗어나지 않았어.’ ‘퍼팅은 거의 PGA 선수급이었지.’ 하지만 현실은, 오늘은 다르다. 그때 그 샷은 멋지긴 했지만, 늘 그런 건 아니라는 걸 잊은 것일까. 우리는 기억을 똑바로 보지 않는다. 기억은 희망을 먹고 자라며, 어제를 현실보다 훨씬 낫게 포장한다. 그리고 그 과장이 오늘의 자신감을 만든다. 과장된 기억이 오늘의 기준이 되어버리면, 볼은 더 이상 타깃을 맞추지 않는다. 어제의 기억이 오늘의 함정이 된다. 잘 맞은 샷은 경계심을 무디게 만든다.

샷을 하기 전에도 긴장하지 않고, 스윙도 대충 흘러간다. "어제처럼만 치면 되지"라는 생각은 오늘을 준비하지 않는 태도를 만든다. 물론 과거 좋았던 샷을 떠올리는 건 마인드 컨트롤엔 도움이 된다. 하지만 딱 그 정도의 활용일 뿐이다.

어제의 성공은 오늘의 실패를 부른다. 나는 자주 속는다. 어제의 나, 어제의 기분, 어제의 스코어에. 그리고 오늘의 나는 그 기억의 그림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골프는 매번 리셋되는 게임이다. 동반자도, 바람도, 잔디도, 날씨도, 기온도, 골프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다르다. 그 누구도 ‘어제의 샷’으로 오늘을 설계할 수 없다. 일에서도 이런 일이 많다. 어제는 발표가 잘 됐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오늘은 같은 발표를 해도, 분위기는 싸해지고 질문은 날카롭다. 관계에서도, 어제는 웃으며 대화를 나눴지만 오늘은 그 미소가 어딘가 무거워 보인다. 몸도 그렇다. 어제는 10km를 달리고도 거뜬했는데, 오늘은 5km만 뛰어도 몸이 욱신거린다. 어제 들었던 중량이 오늘은 왠지 더 무겁게 느껴진다 등 어제는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은 오늘로만 살아야 한다. 어제를 기억하되, 그 기억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골프클럽을 쥐고

다시 티에 공을 올린다. 셋업 하는 느낌이 뭔가 어색하고 조금 더 느슨하다. 머리카락에 닿는 바람도 어제와는 다르다. 몸은 확실히 무겁고, 어제보다 더 나를 속인다. 그럴 땐 되새겨야 한다. “오늘의 나는, 오늘의 나일뿐이다.”

골퍼들이 말하는 골프의 매력은 매일 다르다는 점이다. 매일이 낯설고, 매번 새로 시작해야 하는 이 무상함. 어제보다 잘 치고 싶다는 생각도 어제처럼만 치고 싶다는 욕심도 그 모든 것이 오늘의 발목을 잡을 뿐이다. 매일 리셋해서 초심자처럼 치는 사람이 진짜 고수라고 생각한다. 어제의 샷은 오늘의 나를 속인다.

그래서 오늘은 또 낯선 볼을, 낯선 목표를 낯선 바람 속에 띄워야 한다. 결과를 모른 채, 단지 오늘의 나를 믿고 스윙하는 것. 그것이 골프고, 어쩌면 인생도 그렇게 흔들리며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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