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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업가 정담 Aug 25. 2024

열네 살, 사채업자의 경험

Chapter 2. The Ambitious Boy #6

인턴 시절부터 유난히 시키지 않은 일들을 하고 사이드잡으로 일을 벌였던 모든 것들(인턴은 서류작업만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내가 유일하게 남들과 다른 점으로 꼽는 이상하리만치 강한 '셀프 모티베이션'에 대한 이야기다.  


한 사람의 인생은 가지고 태어난 DNA, 환경, 성장과정과 주위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상당 부분 결정된다고 믿는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는 사고방식과 가치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어렸을 적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것은 더욱 강화된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지금 내 인생의 모습은 어렸을 때부터 내가 경험하고 만났던 사람들과 나에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많은 부분 결정되었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성공한 집안의 자녀들은 어렸을 때부터 성공한 사람들의 틈 속에서 좋은 교육과 지원을 받으면서 자란다. 그리고 그들의 연쇄적인 성공은 통계치로도 증명된다. 성공행 특급 티켓을 손에 주고 태어났다고 할까? 


부유한 집안의 자녀가 '저는 사업가가 되고 싶어요'라고 한다면, 그를 도와줄 주위의 성공한 사업가들이 수두룩하고 기꺼이 성공으로 통하는 다리를 놔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처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게 아니라면 성공하기까지는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스스로 좋은 교육자와 정보를 찾아야 하고 검증되지 않은 의사결정의 길목에서 명확한 조언을 줄 사람도 마땅치 않다. 그러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을 수밖에 없고 자원 활용도 비효율적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처럼 성공을 방해한다. 


결국 좋은 조건을 타고 난 사람들보다 수십, 수백 배의 노력을 해도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서기는 결코 쉽지 않다. 




나는 어느 쪽일까? 나 스스로에게 엑스레이를 들이대 보자. 나는 거친 정글 속에서 내 앞을 가로막는 가시덤불들을 외롭게 헤쳐나가야 하는 터프가이의 운명이다. 좋은 조건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사춘기가 끝나기도 전에 우리 가족은 큰 시련을 겪었다. 나는 그렇게 높은 곳에서 밑바닥으로 떨어진 몰락한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아버지의 회사는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중소기업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은 물론 동네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냈을 정도였다. 


기억나는 장면은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항상 아버지에게 90도로 허리 굽여 인사를 했던 장면과 당시 아버지의 지갑이 만 원짜리 지폐로 항상 터질 것 같았던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내성적이고 수줍은 성격이었던 나는 갖고 싶은 게 있을 때도 소심하게 눈치를 보던 편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가장 비싼 자전거, 청바지 등을 호쾌하게 사주시곤 했다.

 


하지만 유복했던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때에 한국은 IMF 외환위기를 맞이했고 아버지의 사업도 이를 피해 가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정말 하루아침에 우리 집은 잘 나가던 사업가 집안에서 빚더미에 앉은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당시 아버지 회사 사정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대출 상환압박에 돈을 구하지 못했었던 것 같다.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급하게 사업을 정리하시고 채권자를 피해 손에 쥔 피 같은 돈도 주식 브로커에게 홀려 홀랑 까먹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채권자의 빚 독촉 때문에 살던 집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리고 다섯 가족이 천호동의 6평 남짓 원룸 오피스텔에 모여 살아야 했다. 

이 모든 게 한순간에 일어났다. 


중학교 1학년에 진학하면서 학급 반장이 되었고 공부를 잘했던 나는 갑자기 바뀐 환경이 낯설기만 했다. 걸어서 등교하다가 버스를 타야 했으니 지각이 잦아졌다. 필기 노트를 집에 두고 왔지만 사채업자들이 있을까 봐 한밤 중에나 몰래 집에 가서 노트를 갖고 나올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에게 혼나는 일이 많아졌고 방과 후에는 유흥가에 위치했던 오피스텔 때문에 빽빽한 인파들을 헤치고 집 문을 닫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난 원래 살던 집에 몰래 들어가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는데 원래 집에 있으면 예전처럼 편안하고 아늑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가지 말라고 몇 번이고 경고해도 이를 어기고 몰래 집에 들어가서 책을 보거나 침대에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왜 다른 아이들처럼 행복하고 재밌는 삶을 살다가 이렇게 마음을 졸이고 숨죽여서 살아야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난 열네 살 나이 소년답지 않게 TV 사극에서 곡을 하듯 정말 꺽꺽 서럽게 울면서 외쳤다.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돼..."




사업의 부도 이후로 아버지는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교대 쪽에 식당을 여셨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주말이면 아버지 식당에 가서 서빙도 하고 배달일도 해 드렸다. 나는 대학생으로서 더 가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식당일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괴리감을 느꼈다. 


아버지가 겨울 눈길에 배달하시다가 넘어지셔서 시퍼렇게 다리에 멍이 드시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 또다시 중학교 때처럼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 하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북받쳐 올랐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나는 취업을 했고, 대학을 다니기 위해 받았던 학자금 대출도 스스로의 힘으로 다 갚았다. 아버지는 칠순이 넘으신 나이에 임대차 계약의 분쟁 때문에 식당을 접으셨다. 그리고 그 와중에 어머니도 정신적인 아픔을 겪으셔서 병원 신세를 지셨고 가족 간의 불화로 뿔뿔이 흩어질 뻔했다. 




대략 이런 스토리가 내가 성인으로서 완전히 독립하기 전의 스토리다. 


아버지가 은퇴하시면서 아버지 세대는 더 이상 큰 변화가 없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나의 세대가 왔다.


난 중학생이 된 이후로 누구보다도 주체적으로 살아왔고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해야 했다. 대학을 갈 때나 취업을 할 때도 부모님에게 잔소리를 들은 적도 한번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조언을 해줄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걸 알아서 할 수밖에 없었다. 공부도 왠지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했다. 


그래서 나중에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기까지 나의 모든 행보와 결정들에는 청소년기 겪었던 어려운 시절들이 트라우마처럼 영향을 미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중학생 때 겪었던 서러움은 경제적인 성공을 향한 열망이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리게 만들었고, 인생을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서 시간가치의 소중함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목표를 향한 강한 집착과 집중력을 갖게 된 것도 모두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가끔 주변 사람들이 넌 왜 그렇게 열심히 사냐고 했을 땐 나도 내가 남들과 어떤 부분이 다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굳이 힘들었던 그때의 삶을 선택하진 않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그 당시의 경험에 감사한다. 


집 안에 숨어서 서럽게 울었던 열네 살 꼬마가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불같은 열정으로 인생을 개척하는 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지금의 경험이 좋든 싫든 당신을 바꿔줄 것을 믿었으면 좋겠다. 


바닥으로 떨어져도 괜찮다.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나에겐 그랬다.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한 애착이 있다면 패배주의가 아니라 반대로 긍정적인 추진력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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