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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독노트

절망과 희망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권김현영 엮음

by 정다운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에 등장하는 배경 사건들 대부분 내게 아주 익숙한 사건들이다. 지금까지 많은 인문사회과학 텍스트를 읽을 때 대체로 배경부터 찾아봐야 했던 것과는 달랐다. 책을 읽음과 동시에 책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만났을 때 내가 어땠는지 떠올려야 했다. 어떤 건 선명하게 기억이 났고, 어떤 일은 어렴풋했다. 다 기억해내고 싶었다. 당시 나를 대면하고, 그때 그 사건을 다시 읽고 싶었다. 그리고 그 어떤 독후감보다 공들여 쓰고 싶었다. 쓰는 것은 공부하는 것이고, 쓰기 위해서는 충분히 탐구하고 사색하고 깨달아야 했다. 페미니스트로서, 반드시 그래야하는 시점이고, 이 독후감이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일정 때문에 절대적 시간이 부족했고, 덜 공부한채로 독후감을 쓴다. 이 글은 조만간 다시 쓰여질 것이다. 일단 한 번 써야, 다시 쓸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숱한 사건들의 목격자였다. 목격자라는 말이 적절한가? 연대자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고. 그저 독자나 청중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당사자였을 수도 있겠다. 박모 시인에 대한 이슈를 실시간으로 팔로업 했고, 박모 시인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진저리나게 싫어했다. ‘참고문헌 없음’ 펀딩이 시작되자 마자 참여했고, 참고문헌 없음 팀에 또다른 성폭력 가해자가 있단 폭로 이후 오가는 논란에 어느 편에 서야 할 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출판사 봄알람의 거침없는 행보에 응원을 보내면서도, 봄알람에 대한 이슈가 시끄럽게 이어지자 슬그머니 지지를 철회했다. 봄알람에도 봄알람의 ‘피해자’ 측에도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그럴 때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할 지 더 애매했다. 나의 지지로 인해 누군가 상처받는 사람이 생길 것이 조심스러웠다. 그들이 나를 비난할까 두려웠다.


이처럼 사회적 이슈에 민감하고 그 이슈와 관련된 온갖 일들을 살피는 걸 귀찮아 하지 않으며, 잘 지치지 않는 편인 나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폭로를 목격하면 대체로 연대하고자 한다.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하고, 편을 들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라 여겼다. 지지를 보내며, 가해자가 누구인지 함께 찾고, 분노하고 비난한다. 가능하다면 입금도 한다. 2차 가해가 아닌가 나도 다른 사람들도 끝없이 의심한다. 그러다 내가 연대한 피해자가 무결하지 않음을 알게 되면, '그래 무결한 피해자는 없지!' 라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마음 속에 불안의 싹이 튼다. 내가 엉뚱한 곳에 연대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하지? 나의 섣부름과 무지를 들킬까봐, 또 나의 연대가 2차 가해가 되었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리고 조금 식는다.


그러니까 그동안 내가, 페미니스트인 내가, 주로 뭘 했냐면, 화를 냈다. 화를 내고, 지켜보고, 잊어버리고, 새로운 사건들이 등장하면 다시 화를 내고, 피해자를 응원하고, 안타까워 하고, 그러다 잊어버리고, 또 다시 화를 내고… 그렇게 내가 그때그때 지지해야하는 편에 서서 바깥을 향해 화를 내고, 싫어하는 것들과 거리를 두고, 또 화를 낸다. 그리고 입 밖으로 꺼내 말한 적은 거의 없지만, 가해자들을 싸그리 다 죽여 없애버려야 사건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말은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단 의미이며, 싸우고 외쳤지만 사실 내가 체념하고 있었다는 걸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을 읽는 동안 알았다.


내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은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걸로 읽혔다.


“법정에서는 강간 ‘범죄’를 다루지, 강간 ‘문화’를 처벌할 수 없다. 강간이라는 범죄를 없애려면 반드시 강간 문화를 변화시켜야 하지만, 법정에서 문화를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점이 공동체 차원의 해결이 여전히 우리의 선택지 중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라는 권김현영 선생님의 말에서, ‘강간 범죄는 없앨 수 있다.’는 전제를 읽는다. 그렇다면 강간 범죄는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범죄일 지도 모르겠다. 희망이 생긴다. 강간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저 멀리 있는 희망을 따라 간다. 순결 신화와 강간 문화가 결합해있는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있나, 아무튼 있다면,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일개 연대자이며 목격자인 나는 ‘반 성폭력의 정치’를 하기 위해 뭘 하면 될까? 문장 사이사이를 붙들고 해답을 찾아 매달린다.


"성폭력 문제의 핵심은 해석을 둘러싼 투쟁이다.(중략) 우리가 판단하고 개입할 수 있는 페미니즘 정치학으로서 반 성폭력 운동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진술에 대한 해석 투쟁의 영역이며, '2차 가해'라는 말은 피해자 중심주의와 결합해서 그러한 해석 투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희망에 닿는 길을 찾기 위해 여러번 등장하는 해석 투쟁이라는 말에 밑줄을 긋는다. 성폭력 판단 기준에 상황적 지식을 적용하자는 말을 꼼꼼하게 읽는다. 사회 규범의 변화를 위한 시도와 사회의 붕괴를 폭로한 증언을 기억한다. 의무와 권리를 재배치하는 권김현영 선생님의 말에 힌트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책 한권이 한꺼번에 해답을 주기는 어렵다. 해답을 찾는 건 나를 포함한 공동체의 몫이겠지.


이 책이 출간된 지도 어느덧 7년이 흘렀다. 들끓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이 책은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영향을 준 걸로 안다. 그래서 7년, 우리의 투쟁은 달라졌을까? 많이 달라지지 못했다면 무엇 때문일까? 이 시점에 우리는 또 어떤 문제 제기를 하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잠깐, 우리에게 희망은 있나? 정희진 선생님의 글에서 길을 더듬어 본다.


"다만, 나는 현재 상황을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희망은 안주하지 않는 삶에서 온다. 자기 만족은 희망이 아니라 헛된 바람이다. 희망은 절망적 상황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끝까지 가는, 바닥을 치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지점에서 시작하기. 이것이 절망만이 가진 가능성이다. 근거 없는 희망보다 생산적인 절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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