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서는 평범한 사람을 원한다.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은 일반인 중에 보통의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상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업마다 기업의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요구하는 인재상도 상당히 달라진다. 같은 기업이라도 하더라도 부서나 업무에 따라서도 요구하는 인재상이 달라진다.
내가 엔지니어 그룹에 있을 때는 깔끔한 옷차림과 인사성, 배경 지식에 대한 풍부한 설명을 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에 분류되지 않았다. 욕을 할지 언정 요구사항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딱 떨어지는 해결책을 도출할 수 있는 사람이 평범함의 범주에 들어간다. 실제로 주변을 둘러보면 이슈 해결과 관련 없는 이야기는 최대한 줄이고,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대화와 어울리는 선배들이 참 많았고, 그런 선배들은 평범하지만 멋진 사람들이었다. 특허팀으로 이동했을 무렵에는 드디어 배경 지식에 대한 풍부한 설명을 하는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회사 외부와의 미팅이 많았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분들과 협업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그린 부서별 에이스의 평범한 모습
회사 생활은 마치 하나의 유리구두에 발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모두 같은 모양의 유리구두를 신고 같은 춤을 추면서 크고 화려한 회사가 연주하는 곡에 맞추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기 때문에 회사는 변하는 세상에 맞추어 연주하는 곡의 장단을 변경한다. 회사가 클래식을 연주할지 힙합을 연주할지 사물놀이를 연주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회사원들은 어떤 장단이 나올지 모르지만 그 장단에 맞추어 다른 사람의 발을 밟지 않고 유리구두를 신고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대체로 유리구두를 신고 왈츠를 추는 방법은 선배들도 알고 있어서 잘 가르쳐 주지만, 어느 날 힙합이나 한국 무용을 추어야 할 때는 모두들 신발을 벗을 생각을 못하고 신발 위에서 낑낑거리면서 서로를 부여잡고 한 발 한 발 떼면서 곡을 완성하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이렇게 터무니없고 안될 것 같은 일도 결국은 해낸다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을 우대하는 평범이의 사회에서는 최대한 평범에 맞추는 것이 성장에 유리하다.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에 얼마나 정확하게 맞추느냐, 또는 상사가 원하는 인재상에 얼마나 맞추느냐가 중요하다. 이미 만들어진 유리구두에 내 발이 맞지 않다면 발가락을 한껏 움츠려 멍이 들거나 발이 미끄러져 다치더라도 다시 일어나 유리 구두를 신어야 했다. 가끔 나는 유리구두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유리구두는 빛을 받으면 반짝이고, 회사가 준비한 왈츠와 조명이 큰 무도회장에서 너무나 잘 어울린다.
유리구두를 벗고 회사에서 나왔다. 나에게 꼭 맞는 적당한 운동화를 신은 느낌이다. 사실은 운동화를 신고 왈츠를 추는 기분이다. 평범이의 사회에서는 회사에서 연주하는 곡에 맞춰 다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선배들의 몸짓을 보고 따라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내 마음속의 음악에 맞춰서 내 춤을 추어야 할 때가 왔다. 그러나 나는 아직 몸에 익숙한 왈츠를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
어릴 적 사회에 발을 딛기 전부터 나는 평범이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아빠는 보험회사에서 영업부장으로 일을 하셨는데, 내가 고등학교 때쯤 밥을 먹다가 영업팀 강의에서 들은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이 있다. 우리 집 부엌의 식탁 옆에는 전지 크기의 화이트보드가 걸려 있는데, 아빠는 무엇인가 신나는 이야기를 하실 때 이 칠판을 이용하곤 하셨다.
‘당신은 친구가 몇 명이 있습니까?’ 아빠가 칠판에 적었다. 아빠가 강의에서 이 질문을 받았을 때, 곰곰이 생각해보고 5명이 있다고 해야 하나, 10명이 있다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 강사는 “저는 친구가 2000명이 있습니다.”라고 했단다. 대충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를 합치면 그 정도 인원이란다. 그러니 친구들에게 편하게 영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강의의 요점이었다. 아빠는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참 대단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다. 나는 사실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참 별난 사람이네.’라고 생각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에게 영업을 하는 것이 무엇이 대단한지 도통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별난이의 세상으로 이직해 오니 그 강사님은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을 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이전에 나의 체면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나의 자존심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지금 나는 동요에 맞춰서 율동을 춰야 하는 상황이지만, 나의 소중한 유리구두를 벗고 우아한 왈츠의 스텝을 포기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작년에 유튜버들을 인터뷰하면서 ASMR을 하는 세나라는 친구와 친해졌다. 원래 음악을 좋아했던 그녀는 회사를 다니다가 ASMR을 듣자마자 이것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바로 시작하는 추진력도 대단하지만, 체면이나 사회적 지위 등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신발을 신고 리듬에 몸을 싣는 용기가 참 대단했다. 심지어 무척이나 잘 춘다! 자신의 가게를 접고 알바를 하는 37세 유튜버 김 사장님도 택배를 배달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택배 아저씨 택아님도 모두들 본인의 리듬에 따라 별나게 세상을 살고 있었다. 체면이나 자존심보다는 자신 속에 있는 리듬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자, 나도 용기를 내서 나에게 꼭 맞는 운동화를 신고, 가볍고 신나게 율동을 해보자! 언젠간 나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 리듬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