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잃은 슬픔을 그냥 묻어두지 마세요
아들이 태어난 지 만 6년이 되었다. 12월생이라 태어나자마자 나이를 먹었다. 이제 내년이면 학교를 간다. 아이가 자라는 6년의 시간 동안 우리 부부는 참 바쁘고 여유 없는 삶을 살았다.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남편의 학업을 마쳤고 나는 나대로 계속 일을 이어왔다.
그렇게 영국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지도 어느덧 1년 반이 넘었다. 결혼생활 8년 차에 처음으로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됐다.
아기를 보면 우리 부부의 눈에 꿀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부터다.
‘둘째를 가져볼까?’
‘정말 그래 볼까?’
7년 가까이 생각지도 않던 둘째를, 우리 부부는 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를 기다리기를 수개월, 나름의 노력은 하고 있었지만 아이는 선뜻 우리 부부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지금 아이가 생겨 출산해도 내 나이 서른아홉인데… 역시, 내가 너무 나이가 많나?’
애꿎은 임신테스트기만 내버리기를 여러 달. 흘러버린 세월 속에 어느덧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내 나이가 야속했다. 나보다 네 살 어린 남편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래도 남편이라도 좀 더 어리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하는 마음으로 긴 긴 시간을 견뎠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혹시나 하는 아주 작은 희망으로 임테기를 꺼냈는데 첫아이를 임신하고 보았던 두줄을 7년 만에 다시 볼 수 있었다.
‘세상에…’
눈으로 내 앞에 선명히 나타난 두 줄을 보고 있음에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렸다. 가슴 벅찬 기쁨과 감동. 아기 천사가 내게 다시 찾아왔다.
웃음이 절로 얼굴 근육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남편은 은근히 자신이 건강 관리를 잘 못해서 안 생기나 고민하고 있었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우리 부부는 드디어 힘든 숙제를 끝냈다. ‘이제 잘 품고 잘 낳고 잘 키워내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6주 차에 아기집을 확인했다. 8주 차가 되어 신나는 발걸음으로 심장소리를 들으러 갔다. 하필 그날 첫째가 감기 기운이 있어 남편은 아이와 다른 소아과 병원으로 갔고 나는 혼자서 첫째를 낳았던 산부인과에 갔다. 익숙한 듯 설레는 듯 체중과 혈압을 제고 순서를 기다렸다.
‘크크 심장 소리는 얼마나 우렁찰까?’
기대되는 마음으로 초음파를 보는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이게 웬일. 쿵쾅쿵쾅 떠들썩해야 할 아기의 심장은 고요했고 크기 또한 작았다.
‘난황이 두 개인 걸로 봐서 쌍둥이일 가능성이 있는데 여기 밑에 큰 난황은 현재로서는 난황만 보이는 것 같아요. 위에 작은 난황에 아기가 보이는데 주수가 6주 크기밖에 되지 않네요. 좀 더 지켜보고 다시 한번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요 ‘
4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 원장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초음파 사진을 설명했다. 주르륵. 순간 내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고 원장님은 그런 내 팔을 살며시 잡으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이가 힘들게 생겼나요?’
‘.. 네..’
간신히 한마디 대답을 내뱉었다. 두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만 흘렀다.
‘아직 몰라요. 쌍둥이의 경우 한 아이가 도태되고 좀 늦게 크는 경우도 있어요. 울지 말고 편안하게 있다가 일주일 뒤에 봐요.’
원장님의 위로를 받고 병원을 나왔지만 흐르는 눈물을 멈출 도리는 없었다. 그렇게 실낱같은 희망과 커져가는 불안을 동시에 안은 채 하루하루를 기다렸다.
병원 예약한 날을 3일 앞두고 아이는 내 몸에서 떠나갔다.
하필 엄마 생신으로 부산을 찾았는데 그 일이 있고 말았다. 근처 산부인과로 가서 유산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다. 남편과 아이는 다시 집으로 올라갔고 나는 부산에 남아 일주일간 몸조리를 했다. 매끼 엄마가 끓야주는 미역국을 먹고 몸을 따뜻하게 했다.
지글지글 끓는 듯한 전기장판의 온도를 낮추면 이내 엄마가 와서 다시 높이고 갔다. 최대한 따뜻하게 있어야 한다고. 유산 후 몸조리가 더 중요한 거라고. 그렇게 내 몸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지만 마음은 아직도 차갑고 쓸쓸했다. 회사에 5일 병가를 내고 멍하니 집에만 있자니 참 시간이 안 갔다.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보았지만 마음의 평안은 없었다.
부산에 머문 삼일 째 밤, 이 슬픔을 잘 다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묻어두지 말자고, 아무리 1cm도 채 안 되는 작은 아기였을지언정 잘 보내주자고.
종이와 펜을 들어 아기에게 편지를 썼다. 내게 와주어 고마웠다고, 더 건강해질 테니 꼭 다시 엄마에게 와달라고. 꼭 그렇게 해달라고.
그렇게 어디로도 붙일 곳 없는 편지를 쓰고서는 엉엉 울었다.
이 작은 애도의 시간이 힘이 된 걸까. 스스로 아기를 잘 보내주었다고 마음먹으니 한결 살 것 같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고, 더 건강한 모습으로 내게 오려했던 것일 거라고 생각하니 이제 앞으로 내가 뭘 해아 할지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남편과 전화 통화하며 운동 많이 해서 꼭 같이 건강해지자고 다짐했다. 건강을 잃으면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다고, 우리 그 무엇보다 건강해지자고.
지금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이 글을 쓴다. 누군가에겐 작을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겐 클 수 있는 유산의 아픔. 나는 나만의 속도와 방법으로 한발자국씩 이 산을 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