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함께 페인트칠 하기
영국에 온 지 언 1년. 처음 집을 구했을 땐 쌀쌀해지는 9월이었기에 무엇보다 집이 따뜻하길 바랐다. 다행히 남편이 점찍어놓은 집은 난방이 잘 되는 훈훈한 집이었다. 비록 방 한 칸에 좁다면 좁은 집이지만, 그래도 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준 고마운 집이다.
그런데 이 집에 처음 왔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드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화장실에 붙어있던 거울이다. 창문 모양의 나무 프레임 안에 거울이 들어있는 직사각형 모양이었는데, 거울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낡아 있었다.
토요일 아침, 바람은 불고 비는 오다 말다를 반복했다. 아이가 기침을 하는 터라 밖에 나가긴 힘들 것 같았다. 그때 남편이 세탁실에서 동그란 통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우리 페인트 칠 해볼까?"
세탁기 뒤편에 하얀색 페인트 통이 숨겨져 있었다. 집의 크고 작은 수리를 도맡아주는 안드레 아저씨가 두고 간 것이다.
"안드레 아저씨 센스 있네."
"왜애?"
"원래 페인트는 색이 조금씩 달라서, 작업하고 남은 페인트는 그 집에 두는 게 맞거든. 그래야 색을 맞출 수 있으니까. 안드레가 다음에 또 쓰려고 여기 둔 것 같아."
"아 진짜? 흰색도 다 달라?"
"조금씩 다 다르지."
미술을 전공한 남편은 페인트에 관련한 여러 가지 정보를 알려줬다. 게다가 남편은 예전에 문래동에서 친한 형과 작업실을 꾸며서 살았는데, 그때 직접 페인트 칠도 해봤다고 했다.
"그때 준혁이 형이랑 유성 페인트로 칠하고 나서 둘 다 토하고 그랬어."
"왜애??"
"수성 페인트는 금방 냄새가 빠지는데 유성은 진짜 독해서 원래 실내 페인트로 하면 안 되거든. 그때 둘이 정말 죽을 뻔했어."
"아 그럼 이건 수성이야?"
"응. 이건 수성이니까 금방 말라. 한번 해볼까?"
"좋아!"
나는 작은 팔레트에 페인트를 뜨고 수명을 다해가던 내 칫솔로 작업을 시작했다. 화장실, 주방, 거실의 흰 벽면에 묻은 지저분한 자국들을 지웠다. 처음엔 양 조절을 못해서 너무 많은 페인트를 묻혀 바르니 자꾸 사방으로 페인트가 튀었다.
"여보, 여기 튀었어. 어떻게 해?"
"응 그건 다 지워져. 걱정 마."
슥삭 슥삭.
"여보 여기도 튀었어 어쩌지?"
"거기도 지워져. 물티슈로 닦으면 금방 닦일 거야."
슥삭 슥삭.
양을 적당히 묻혀 좌 우로 솩 솩 칠해주니 얇고 깨끗하게 펴 발리면서 페인트가 튀지도 않았다.
'포인트는 양 조절이군.'
혼자서 조금씩 요령을 익혀가며 페인트 칠하기 삼매경에 빠져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슥삭슥삭 더러운 부분을 칠하니 기분이 좋았다. '흰색이 주는 깨끗함의 매력이 이런 거구나!'를 느끼며 약간의 시큰한 페인트 냄새도 잊은 채 열심히 칠을 했다. 혼자 하는 작업이다 보니 누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생각을 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도 아니라 너무 재미있었다.
"여보, 나 적성을 찾은 것 같아. 너무 재밌어."
"흐흐 진짜?"
"응. 이거 완전 내 스타일이다!"
그렇게 내가 벽면을 칠하고 돌아다니는 동안 남편은 문제의 거울을 가지고 발코니로 나갔다. 딱딱한 수세미(사포가 있으면 좋겠지만 없으므로 수세미로 대체)로 표면을 긁어내고 다시 페인트칠하기 좋게 만들어 왔다. 우리는 2인 1조가 돼 함께 페인트칠을 했다. 물질이나 재료의 성분, 성질 등을 잘 아는 남편이 작업 지시를 내려주면 나는 행동파 대장처럼 슥삭슥삭 칠을 했다.
남편은 칠을 한 뒤 드라이기로 말려야 한다고 했다. 말리고 칠하고 말리고 칠하고 그렇게 두세 번 하고 나니 지저분했던 거울이 깨끗해져 갔다. 약간의 울퉁불퉁함은 있지만, 뭐, 유럽풍의 빈티지한 느낌을 풍기는 것이 나름 괜찮았다.
"거울에 페인트 튀는 건 걱정 마. 이것도 다 제거하는 방법이 있다고."
남편은 페인트 칠하기와 말리기가 마무리되자 커터칼의 칼날을 가져와 전문가처럼 거울에 붙은 페인트를 긁어냈다.
거울까지 깨끗해지자 다시 화장실 벽면에 걸고 예전에 놀러 갔을 때 사온 라벤더를 묶어 걸었다.
"와! 진짜 깔끔해졌다! 너무 마음에 들어!"
"그러네!"
"진작에 할 걸 그랬다. 그렇지?"
"그러게 말이야."
거울이 깨끗해지니 왠지 한 번 더 거울을 보고 싶어 졌다. 새하얘진 거울이 내 얼굴까지 하얗게 비춰주진 않았지만 (난 이미 까맣게 탔으므로) 마음을 더 밝게 해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지저분하다고 방치해뒀던 시간들을 반성하면서, 새하얗고 깨끗하게 변신한 거울에, 더 하얗고 맑은 내 모습을 많이 비춰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