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을 꽉 채운다고요?
뭐라고요? 5일을 다 한다고요?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학교마다 새학기를 준비하는 주간을 선정하여 개학 전에 여러 가지 세미나를 진행한다. 말은 세미나지만 대부분 업무 전달 회의와 학급 환경 구성, 교육과정과 평가계획 수립과 같은 일들을 한다. 보통의 학교에서 이 주간은 3일을 넘지 않는다. 계획은 3일로 잡아 놓아도 이틀 만에 끝내는 학교도 제법 많고, 반나절만에 후다닥 업무 배정과 교육과정 설명을 마치고 나머지 일정은 교사가 알아서 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교방은 무려 5일을 꽉꽉 채워서 세미나를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순수한 세미나로만 말이다. 세미나 일정표에는 철학, 비전, 환대, 성찰, 독서토론과 같은 낯선 말과 일정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독서토론을 위한 책을 미리 주면서 토론 전까지 읽어오라고 했다. 원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였으나, 학교 구성원이 모두 같은 책을 읽고 함께 토론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 이는 대부분의 교사에게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교사에게 ‘세미나’는 낯선 단어이다. 유명한 강사를 불러서 적당히 강의 듣고, 어색한 박수를 치며 마무리하는 ‘연수’는 많지만, 구성원 스스로의 힘으로 토론하고 거기에 대한 결론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세미나 문화가 학교에는 없다. 학교는 모든 구성원이 체력을 단련하는 배구 문화는 있으나, 교사의 본업인 지성을 단련하는 세미나 문화는 없다. 어제의 간질거림이 5일과 세미나라는 단어에 가려 사라질 즈음, 마침 쉬는 시간이 되었다.
교방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모여서 환한 미소를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도 슬그머니 끼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세미나에 대해서 슬쩍 이야기를 던졌다. 얼핏 보아도 어려운 내용과 일정인데, 이것을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K는 눈을 가리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보드라운 미소를 건넸다. 그리고 “지금 함께 이걸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힘들어져요.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 순간 끝나 있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라며 달콤한 목소로 속삭였다.
K는 유독 ‘지금’과 ‘함께’라는 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왜 이것을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까? 왜 모두가 모여서 함께 해야 할까? 무엇보다 5일의 일정을 함께 하려면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세미나 주제에 집중하는 문화가 필요한데, 이게 가능할까? 나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K는 다시 한번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려고 했으나, 학교 비전 세미나를 진행하는 선생님이 나오시자,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내며 돌아섰다. 내가 떠올렸던 물음에 대한 답을 건넨 사람은 J였다. J는 설명이 아니라 온몸으로 그것을 답하고 있었다.
J는 교장선생님이었다. 그런데 나는 세미나가 한 참 진행되어도 J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학교는 회의나 연수 시간에 ‘교장의 자리’가 정해져 있다. 분임별 토의가 진행되어도 교장은 그 자리에서 엄숙한 표정으로 교사를 관찰하거나, 센스가 있으신 분은 교장실로 갔다가 토의가 마치면 자리로 돌아온다. 관리자는 교사들을 관찰하거나 아예 그곳에 없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J는 둘 다 아니었다. 연신 자리를 옮기며 교사와 섞여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고, 교사가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꺼내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J는 제다이의 눈으로 교사를 바라보며 “선생님의 이야기가 궁금해 미치겠어요”라며 마음의 빗장을 걸고 있는 교사에게 연신 주술을 걸었고, 교사들은 이내 주술이 걸린 듯 자신의 생각을 포스트잇에 적으며 삶을 털어놓고 있었다. 그 이상한 장면이 세미나 끝까지 이어졌다.
어떤 교사보다 즐겁게 세미나에 참여하는 J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자 에너지였다. 나의 생각과 진심을 미래의 어떤 시점으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이곳’에서 표현하며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는 J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주인공’ 그 자체였다. 현재를 살아가려면 나의 삶을 지금 꺼내 놓아야 하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야기와 이야기가 사람을 통해서 연결되고, 거기에 나의 이야기를 덧댈 수 있을 때 우리는 동원되는 존재가 아니라 주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J는 끝없이 움직이며 사람과 사람을 연결했던 것이다. 5일의 시간은 지금, 함께,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연습하는 시간이었다.
교방에서 3년을 지내며 함께한 J는 언제나 ‘뒷 것’이었다.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에는 김민기의 삶이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재현된다. 그는 평생을 약자의 삶을 증언하고, 함께 연대하며 살자는 메시지를 남긴다. 미래의 행복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내는 서민의 삶을 노래와 연극으로 남겼고, 모두가 저마다의 이유로 삶의 주인으로 살도록 도왔다. 예술인과 아이들이 자본에 동원되지 않고 품격 있는 삶을 살도록 평생을 도왔다. 그는 뒷것에 머물렀지만, 모두의 삶을 주인으로 만드는 사람의 삶이야 말로 진정으로 주인의 삶이었다. 그를 추억하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교사로 사는 일도 뒷 것으로 사는 일이다. 아이들이 품격 있는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동시에, 자기 삶의 이야기를 ‘지금, 함께’ 나누며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하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오랜 시간 교사를 삶의 주인이 아니라 ‘동원되는 존재’로 전락시켰다. 영화 〈파묘〉에 나오는 험한 것처럼 말이다.
〈파묘〉에 등장하는 험한 것의 본질은 ‘동원되는 존재’라는 데 있다. 그는 지금을 살지 못하고 제국주의의 미래인 ‘북진’을 위해 동원된다. 그는 이웃과 함께 살지 못하고 살인의 경쟁에 치여 외롭게 살아간다. 그래서 그의 삶은 지금 여기에 딛지 못하고 불꽃이 되어 허공을 배회한다. 그 헛헛한 배회는 그가 한순간도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동원되는 존재라는 것을 아리게 증명한다.
사회와 학교는 교사를 동원하는 문화만 가꾸어 왔지, 교사를 삶의 주인으로 기르는 문화에 관심이 없었다. J의 날랜 움직임과 세미나에 집중하는 교사들의 표정과 삶의 이야기가 수 놓인 너른 종이를 바라보면서, 비로소 내가 그동안 동원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혁명가와 이론가들은 동원되지 않고 해방되기 위해서 처절한 투쟁과 체계적 준비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해방을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교묘하게 미룬다. 그러나 교방은 지금, 함께 해방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교사가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서 교방은 오랜 시간 정성스레 5일의 세미나를 준비한 것이다.
학교 비전 세미나를 마치고 학년 협의를 위해 연구실로 이동하려고 하는데, K와 J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곳을 빠져나와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K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둘은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