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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정선생 Jun 26. 2024

교사여, 제발 새우튀김만은 먹지 말자!

교사의 고통: 외전(2)

  적어도 교사라면, 새우튀김을 먹을 때만큼은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한다. ‘겉바속촉’으로 분열된 새우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교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바삭함과 촉촉함은 동시에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다. 두 가지 감각을 모두 느끼고 싶다는 욕심에서 만들어진 것이 ‘튀김옷’이다.

     

  튀김옷은 새우의 몸과 세상을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새우가 품고 있던 수분이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 동시에, 눅눅한 반죽에 포함된 수분이 고온의 기름과 만나면서 부서지기 직전의 공기막을 만들어서 새우의 모습을 가리도록 돕는다. 이 아슬아슬한 공기막의 연결체가 ‘바삭함’이 된다. 그러니 새우튀김이 선사하는 촉촉함은 새우에게 선언된 진득한 고립이고, 바삭함은 새우의 삶에 강요된 아린 가벼움이다. 

    


 

  우리 사회도 교사에게 ‘겉바속촉’을 강요한다. 교사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들을 군말 없이 깔끔하게 수행하는 바삭한 삶을 살아야 한다. 동시에 내면은 늘 촉촉한 감수성을 잃지 않고, 아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 잠시라도 ‘겉바속촉’을 잃으면 ‘왕의 DNA’를 잘 모시라는 슬픈 편지가 날아든다. 교사가 주도하는 ‘따뜻하고 냉철한 교육’ 아니라 사회에서 강요한 ‘겉바속촉의 교육’이 교사의 일상이 되면서 교사의 내면은 빈틈없이 분열되었다. 내면이 분열된 사람의 삶은 바삭하게 흩어질 뿐이다.     


  교사의 삶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문화와 철학을 상실한 무수한 교육정책은 교사에게 완벽한 ‘튀김옷’을 입혀놓았다. 견고한 튀김옷을 벗지 못하는 한, 교사가 겪고 있는 수많은 고통은 결코 치유될 수 없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새우튀김을 먹을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웃으며 새우와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한다. 교사가 존엄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나는 새우를 위해 은쟁반과 하이얀 모시수건을 준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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