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유가 많아졌다. 마음이 느긋해지니 부자가 된 느낌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모든 것이 안정되고 있다는 신호가 온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뭐지?
유년의 때와 청소년 시기에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보이지 않는 억압으로 작용해 자아실현에 소극적이었고, 꿈을 꾸어 보기는 해도 생각에만 들락거릴 뿐 어쩔 수 없이 마음에 담아 두기만 했다. 사오십 대에는 무언가에 쫓기듯이 살다 보니 매사에 징검다리를 건너듯 조심스러웠다.
대다수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삶이 기울어질 때면 ‘이게 내 운명이지’라며 한숨만 내쉬었을지도 모른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도 되는 것처럼 여러 지인들이 그렇게 사는 것을 보아왔다. 가까이에는 남편이 그랬다. ‘이게 뭐란 말인가?’ 가족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자신은 어디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점검했어야지.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라고 말하지 말자. 그렇게 행동한 것이 잘한 것처럼 자기 안에 오래 갇혀 있지 말라는 거다. 영악한 계산은 아니라도 최소한 자신의 미래도 돌봐야 하지 않았을까. 희생은 상대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몇 년이 흘러도 전화 한 통도 없는 동생들을 보면서 느끼는 게 있길 바란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 ‘소’가 ‘대’를 위해 희생한 것은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해도, 의무였다고 해도, 나름대로 행복할 수도 있다. 근데 시대가 아주 많이 변했다. 나만이 나를 책임져야 하는 냉철한 세상이 되었다. 결국은 혼자 걸어야 한다. 을씨년스러운 노인이 되지 않기 위해 경제적 준비를 해야 된다는 말이다. 무엇이든 붙잡겠다는 말이 아니다. 먹고사는 게 뭔지, 노후 준비는 물질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요즘이니까. 그렇지만 가장 먼저 할 것은 살아오면서 쌓이고 겹친 인본주의나 욕심에서 자신을 분리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우리 부부는 노후 준비하는 시기가 좀 늦었다. 하나 이제라도 해보려 한다. 언제나 긍정적으로 마음을 다스려보자. 그리고 감사가 습관이 되도록 하자로.
부모님. 그분들은 노후 준비라는 생각조차 사치인 시대에 사셨기에 복잡한 마음도 없었을 것 같다. 십 리, 이십 리 걸어 다니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조금은 부족해도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 어떤 것과도 갈등하지 않았다. 그때야말로 환경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오늘날 너무도 풍요로운 사회 면면을 보면서 다음 세대를 향한 희망이 아닌 불안감에 마음이 답답해온다.
오늘도 옛 기억을 더듬어 잠시 행복하고 싶어졌다. 요리할 때 가끔 엄마 얼굴이 떠오르고 음식을 먹을 때도 ‘훅’ 하고 스쳐 지나간다. 그럴 때마다 ‘나는 딸들에게 어떤 엄마로 기억될까’ 생각해 보게 된다. 예전의 모습과는 다른 나를 보면서 나이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 드는 것이 조바심도 없어지고 걸음도 천천히 걸을 수 있고 많이 웃게 되어서 좋다.
‘그래 이렇게 사는 거야’
콩나물 천 원어치를 사도 한 움큼 더 주기를 원했던 때가 있었지만 이젠 너무 많이 주는 것도 싫어졌다. 그저 우리 두 사람 먹을 만큼만 있으면 족하다. 천천히 걷는 즐거움은 또 얼마나 큰지 모른다. 빨리 걸으면 보이지 않는 풍경들이 다 보이니 즐겁다. 나이가 들수록 음식은 오래 씹어서 삼켜야 한다는데 그렇게 해야지 했다가도 잠시 딴생각하는 사이에 목으로 넘어가 버리니 황당 그 자체다. 50번 이상 숫자를 세어 가며 씹어도 그때뿐이니 참 못 말리는 할머니다.
못 말리는 사람들은 또 있다 정치하는 분들. 예측 불가능한 날씨처럼 혼란스럽다. 언론에서는 가짜 뉴스를 진짜인 것처럼 떠들고 그러고도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책임도 지지 않는다. 글로벌 시대에 살면서도 억압이라는 단어를 여기저기에서 보게 되니 안타깝다. 세상에는 진실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정치를 보면 화가 난다. 질서도 없는 도떼기시장 같고. 불성실한 언어를 거르지도 않은 채 내뱉을 땐 ‘저런 무식한 사람도 국회에서 일해?’ 하고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신다고 성경에 쓰여 있는데 그런 고로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국민을 대표한다면 한번만 더 생각하고 말했으면 좋겠다. 거리낌 없이 정제되지 않은 말을 하고도 내 마음은 내 것이라는 식은 무책임한 것이지.
누구나 그렇겠지만 난 내가 먼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가족들도 즐겁고 이웃들에게도 마음을 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요즘 머리가 가끔씩 아프다. 평안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는데 툭툭 건드리는 일들이 생긴다. 코로나19가 언제까지 맴돌지 신경을 거스른다. 글 쓰다가 잠시 쉬는 사이 창밖을 보니 첫눈이 팔랑팔랑. 언제부터 내려오고 있었을까? 베란다에서 보는 풍경은 한 장의 수채화를 그려 놓은 듯 예쁘다. 코로나로 지친 모두를 위로하듯이. 이 작은 위로에도 감동받는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고 그러기에 행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