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하는 걸까 안 하는 걸까
위한다고 하며 받는 입장에서는 달가워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 불편하기만 한 행동들에서 우리의 소중한 이가 진실로 선한 의도를 가졌다는 믿음으로 관계를 지속해 나간다. 표면적으로는 파악하기 어렵기에 우리는 그냥 믿는다. 만약 우리를 성가시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 행동을 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관계의 본질인 믿음은 없어지고 끝이 난다.
소중한 것과 편한 것은 다른 문제이다. 소중한 사람이 불편할 수 있고, 그닥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편할 수도 있다. 우리는 위와 같은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이들과 우리의 모든 삶을 공유하려고 하지 않으며, 공유할 수 있는 범위는 그 점점 줄어들 것이다. 예를 들어 B가 앓아 누었다는 소식을 들은 A는 B가 몇 차례 혼자가 편하다며 거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죽과 약을 사들고 B에게 전달해주었다. 집까지 와준 A를 매정하게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던 B는 차 한잔을 대접하였고, B가 죽을 다 먹고 약을 먹는 것까지 본 A는 마지막 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증상이 더 심해진다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B는 A가 좋은 마음으로 이런 행동을 한 것을 믿었지만, 다음부터는 아무리 아파도 A에게는 절대 아픈 것을 알리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A의 선의는 아픈 B를 더욱 피곤하고 힘들게 하였다. A가 당시 자신의 이타주의적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구나, B를 보고 싶은 욕구 등 이기적인 욕구들을 가지고 있을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이상 B를 위한 진실한 선의일 것이다. 소중한 이가 아프면 간호해주는 것이 보편적이기에, 혹은 자신이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었기에 B에게도 그것이 필요하리라 판단하여 열 일 제치고 달려갔을 것이다.
애초에 B가 A나 보편적인 사람들처럼 아플 때 홀로 있기보단 누군가가 함께 있어 주길 원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양한 본질적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A 또한 어떠한 부분에서는 보편적이지 않은 구석이 있을 것이다.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을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그 다른 부분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제 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모든 인간은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타인의 칭찬에 기분이 좋지 않아야 하며 욕에 기분 나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자신과 같을 것이니까 말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수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사회든 보편적이 기준이라는 것은 존재하고, 은연중 그것에서 벗어난 요소를 가진 사람들을 '맞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보편적인 것이 옳음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편적이지 않은 구석이 있는 사람을 힘들어한다. 의식적으로는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자신과 같은 기준을 들이대며 그것이 옳은 것으로 생각하고 맞추길 강요한다. 그렇기에 보편적이지 않은, 다양한 속성들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 앞에서는 굳이 그것들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공적으로는 어쩔 수 없지만, 우리 중 사적인 관계에서까지 불편한 시간을 감내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편한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소중한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의 소망이 더해져 우리는 사적으로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보낼 때 편하길 원한다. 개인은 개인의 본연의 모습일 때 가장 편하다. 타인의 본질적 속성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하는 타인 앞에서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언젠간 지적에서 나오는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며, 그렇다고 본연의 모습을 감춘다면 감춤에서 나오는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타인과 함께 있을 때 편하려면 자신과 완벽히 똑같은 사람과 함께 하거나 사람의 본질적 속성의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사람이 그 사람들이 우리와 본질적 속성이 같거나 다르더라도 인정해주길 바란다.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원하기에, 그 사람이 우리가 우리의 본연의 모습일 때 그것이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라는 것이다.
사이코패스적 기질을 가진 사람인 나는 여러 가지 보편적이지 않은 본질적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감사하게도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나의 본질적 속성들을 틀렸다고 말하지도 않고 이해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기에 (내가 뭘 가졌든 상관없이 존재 자체를 좋아해 주는 것 같다) 나의 본연의 보습 그대로를 보여줘도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함에서 발생하는 피곤함은 없으며,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도 편안함을 느낀다. 반면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에서도 그들과 나의 다름을 드러냈을 때 인정하지 못하고 불편해하거나 굳이 이해하려 하는 사람들이 속해 있는데,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는 이 사람들을 굳이 불편하게 만들기도 싫고 힘들게 하기도 싫어, 내 본연의 모습을 잠시 접어두고 그들에게 맞춰준다. 이것이 나로선 이 그룹에 속한 내 소중한 사람을 위한 당연한 배려라고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매우 소중하고 즐겁지만, 그렇다고 그 시간에 피곤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끔 아주 가끔 내가 무언가로 힘들거나 피곤한 상태에서 이 사람들이 만나자고 한다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본질적 속성의 다름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상대에게 스트레스를 참아달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에, 소중한 사람이라 하면서 불편함을 참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진짜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나의 소중한 사람들은 이것을 못 하는 것일까? 안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