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배운 것
수업이 없는 날이지만 학교 도서관 가서 휴대폰 충전도 하고 조금 저렴한 커피를 마시면서 컴퓨터도 쓰려고 했는데 아차, 파업일이다. 건물 앞에 서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나에게 Support our strike라고 쓰인 핑크색 종이를 내밀었다. “네가 우리를 지지한다면 오늘은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어때?”라고 제안했다. 나는 흔쾌히 알겠다고 하며 피켓라인을 넘지 않고 돌아서서 나왔다.
파업은 기차회사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2022년 겨울부터 영국 전역에 걸쳐 교육분야 파업이 진행됐다. 교수는 수업시간을 할애해 왜 파업을 하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교수들 간 경력, 성별, 인종에 따른 보수 차이 등을 설명했다. 파업하는 날이 언제인지를 말해주며 피켓라인에 와서 자신들을 응원해 줘도 좋다고 했다.
계속된 파업은 나의 석사과정 수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학기 초에 주별로 정해진 주제에 따라 3-4명씩 프레젠테이션 할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하필 내가 속한 그룹이 발표하는 주에 파업이 결정됐다. 나와 중국 친구 3명은 우리 프레젠테이션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물어보러 교수에게 갔다. 그들도 나도 보강 같은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수업에서는 파업한 날에도 학생들 스스로 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해 주었기에, 이 수업은 그런 자료가 있는지 물었다.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수업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 거야.
그래서 그 주에 해당하는 주제는 다루지 않을 거고 다른 자료도 없어.
나에게는 그 말이 조금 냉정하게 들렸다. 하지만 분명한 소신을 가지고 동료들과 연대해 파업을 감행할 수 있는 분위기가 놀랍고 부러웠다. 파업은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무조건 하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건강한 사회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업의 불편을 감수해 주며 각자 자연스럽게 대안을 찾는 분위기도 부러웠다. 학교에서는 메일로 기차 파업일에 대해 안내해 줬고 파업일에 있는 수업은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됐다. 노조를 만드는 것은 회사에 대한 반역이라 들었던 사회 초년병 시절이 떠올랐고, 그저 순응하고 충성하는 것이 최선인 줄 알았던 내가 부끄러웠다.
같은 조였던 친구들과 나는 그럼 우리 학비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수군거리며 교실을 나왔다. 국제학생 학비는 영국 학생의 딱 두 배이다. 날아간 수업에 비싼 학비가 아깝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토론과 발표를 안 해도 되었기에 조금 홀가분해졌다. (나중에 학교 측에 이의 신청을 하여 놓친 수업 시간만큼의 학비를 돌려받았다.)
교육 파업은 길어졌고 초등학교로까지 확대됐다. 아이들도 선생님께 파업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학교 전체가 문을 닫은 날도 있었다. 선생님들에 따라 수업을 하는 반도 안 하는 반도 있는 날도 있었다. 파업을 하는 날에도 돌봄 교실 같은 형태의 보육은 이루어졌다.
런던에 와서 아이들 적응도 돕고 엄마 아빠도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넷이 똑같은 노트를 사서 일기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앉아서 일기 쓰는 것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했다. 특히 첫째는 매일 비슷한 문장들을 쓰면서 일기 쓰는 것을 정말 지겨워했다. 어느 날 아이들 둘이 거실에서 사부작사부작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종이를 문 앞에 붙이더니 문을 닫고는 엄마 아빠는 거실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유치권 행사 중'은 아마도 서울의 어느 건물에 걸린 대형 현수막에서, '일기 반대 운동'은 책 어딘가에서 봤던 모양이다. 문을 닫고 출입을 통제하는 것은 런던에서 배웠나 보다. 아이들은 그렇게 보고 들으며 런던을, 영국을 흡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