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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겨울

몇 그루의 전나무와 캐럴, 우주비행사 9

by 정재은

영국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 진심이었다. 시월 중순부터 핼러윈 장식과 함께 크리스마스 트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학부모 어플에도 트리용 전나무를 판매한다는 공지글이 올라왔다. 트리를 꾸미기에는 벅찼지만 크리스마스를 맞아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보기로 했다. 고심 끝에 고른 것은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에서 하는 <The Fir Tree(전나무)>였다. 안데르센의 동화로, 호기심 많은 전나무가 숲 밖의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라고 했다. 소품이나 무대 장식을 재활용품을 이용해 만든 것도 마음에 들었다.


공연 전에 종이 박스로 새를 만드는 워크숍이 있어서 참여했다. 새 모양으로 된 종이 본을 가져다가 박스에 따라 그렸다. 그린 모양대로 가위로 잘랐다. 두꺼운 박스를 작은 아이들용 가위로 자르려니 무척 힘들었다. 잘라낸 새 모양을 스태프가 나무 막대에 글루건으로 붙여줬다. 눈과 부리를 그려 넣은 얼굴을 꽂아 완성했다. 종이로 된 새는 흔들 때마다 날개를 펄럭였다. 공연 중에는 다 같이 이 새를 흔드는 장면이 있어 아이들이 즐거워했다.


네 식구가 공연을 보면 비용이 상당히 부담되는데, 글로브 극장에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서서 볼 수 있는 스탠딩석이 있었다. 공연시간은 60분 정도였기에 가능하리라 생각하고 예매했다. 롱패딩과 털모자, 목도리로 무장하고 우리가 만든 새를 손에 들고 비장하게 스탠딩석에 자리를 잡았다. 무대가 아이 키보다 높았기 때문에 바로 앞에 아니라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객석 마당 중간중간에는 전나무 트리가 세워져 있었고 거기에 노래 가사를 볼 수 있는 큐알 코드가 붙어 있었다. 공연이 가까워질수록 다른 관객들이 우리 앞으로 들어왔다. 우리 아이들보다 큰 애들도 있어서 아직 키가 작은 우리 아이들의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늦게 온 관객 중에는 아이들만 앞쪽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런 배려 없는 행동들 때문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객석은 가득 차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런데 나는 공연 중간쯤부터 등 한가운데가 가렵기 시작했다. 가려움을 해결하려면 백팩을 내려놓고 두꺼운 외투와 내의들을 벗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한 번 가렵기 시작한 곳에 온 신경은 집중됐다. 빨리 긁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공연이 어떻게 마무리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멋진 트리가 되는 꿈을 이루고 잘라져 불타는 원작과 달리 다른 꿈을 찾아가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공연을 본 지 며칠 지나고, 크리스마스도 지나고나서 길가에는 잘린 전나무들이 뒹굴었다. 트리로 쓰였다가 버려진 나무들이었다. 공연을 구성하는 그런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버려지는 나무가 상당히 많아서 나무를 수거해 가는 날이 따로 있다고 했다. 이것들을 모아 동물원 등에서 재활용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수거일 이후에 내놓아 길가에 방치된 트리들이 즐비했다.


버려진 크리스마스 트리들


크리스마스 다음날은 영국 박싱데이였다. 이날을 비롯해 전후로 상점들은 일제히 할인행사를 했다. 며칠을 들락거리며 지켜보다가 무지개 빛이 도는 와인잔 4개 들이 박스에 빨간 스티커를 발견했다. 그것은 할인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무려 반값이었다! 계산을 하려는데 바코드를 찍어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잘못된 듯 확인을 해보더니 종이에 숫자를 써서 보여줬다. 무슨 뜻인지 영문을 몰라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할인된 가격에서 더 할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득템이었다. 우리는 정말 기쁜 마음으로 와인잔 세트를 샀다. 나중에 친구집에 놀러 갈 때도 이 와인잔 세트를 선물했다.


득템 하여 더 예뻐보였던 와인잔


크리스마스를 맞아 아이들 학교에서도 행사가 있었다. 3학년인 첫째는 캐럴 콘서트를 2학년인 둘째는 연극을 했다. 둘째는 '우주비행사 9'였다. 수많은 우주비행사 역할 중 무려 아홉 번째였던 둘째의 대사는 "Oh, for goodness sake!"였다. 공연에서는 머리를 치며 "Oh, dear!"로 마무리했다. 아주 짧게 지나갔지만 그래도 학교에 다닌지 겨우 한 달 남짓된, 울며 들어갔던 아이가 무대에 서서 연극을 해낸다는 것이 대견했다. 급하게 다른 한국 엄마께 빌린 우주비행사 의상도 꼭 맞아서 다행이었다.


첫째는 여섯 곡쯤 되는 캐럴 가사를 외우느라 며칠 동안 가사가 적힌 종이를 붙들고 있었다. 자기 전에 이불 위에 엎드려 아이는 캐럴을 불렀다. 둘째와 나도 멜로디가 익숙해져 함께 흥얼거렸다. 그렇게 조금씩 익숙해지고 편안해져 가는 순간들이 좋았다. 첫 주를 빼먹고 시작한 나의 첫 학기도, 뒤늦게 합류한 아이들의 가을학기도 끝났다. 2022년이 저물었다.


이미지: The Fir Tree set at Shakespeare's Globe. Credit: Ellie Kurt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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