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젓가락으로
나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여전히 호리호리하면서 어딘가 힘없는 걸음걸이가 그대로였다. 다만 머리카락이 많이 길었고 안경테가 바뀐 듯했다.
우리는 2018년 서울에서 만났다. 내가 일하는 극장에서 영국 극작가인 그의 작품을 번역해 공연을 올리게 됐고, 작가를 서울로 초대했다. 그가 공항에 도착하는 날 갑자기 픽업차량이 취소되어 패닉상태로 다른 픽업차량을 예약했던 기억이 난다. 공연 준비로 정신이 없었지만 한국이 처음인 작가에게 신경이 쓰였다. 많이 서툴렀고 정신없었던 날의 고객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런던에서 그의 공연 소식을 접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휴대전화에 그의 메일 주소와 영국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메일을 보냈다. 하루 뒤에 답장이 왔다. 그는 여전히 핫메일을 쓰고 있었고 전화번호도 그대로였다.
그가 점심을 먹자하며 한참 걸어간 곳은 초밥 파는 체인점이었다. 그와 같은 것을 골랐고 그는 내 것까지 사준다고 했다. 정말? 하고 물었더니 너는 나의 게스트라며 함께 계산한다. 런던에서, 영국 극작가와 마주 앉아 검정깨가 잔뜩 묻은 김초밥을 젓가락으로 먹게 될 줄은 몰랐다. 인연은 참 신기한 것이다.
그는 영국인답게 기분 좋은 칭찬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풀었다. 너는 그때도 영어를 잘했지만 지금은 더 좋아졌다고 했다. 나는 그러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그동안 내가 영어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를 거다. 당연히 좋아졌어야 맞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생각나는 단어들만 뒤죽박죽 나열하고 있었다. 단어 생각하는데 왜 이리 오래 걸리는지, 영어가 잘 안 되는 날이었다.
팬데믹 기간 동안 그만둔 동료 작가들이 많다고 했다. 자기는 영화 작업을 하게 되어 계속 쓸 수 있었다고 했다. 작년엔 엄마가 아프다 금방 돌아가셔서 힘든 한 해였고 올해는 아이가 태어나고, 여러 가지로 다른 해라고 했다. 그는 두 아이 아빠가 되어 있었다. 휴대전화에서 첫째 딸과 둘째 아들 사진을 보여줬다. 아직 둘째가 어려서 밤에 잠을 잘 못 잔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를 만나서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부족했던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나 의기소침해졌다. 후회스러웠다. 지난 몇 년간 애썼던 일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남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몇몇 인연이 남았구나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1학기 수업 중에 한 공연을 정해 에세이를 쓰는 과제가 있었다. 내가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작품에 대해 썼는데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는 감정의 앙금들이 기분을 요동치게 했다. 여전히 불쑥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후회도 됐다. 그러다가 대본을 읽으니 익숙한 대사들이 배우들 목소리로 들려왔다. 유튜브에 있는 원작 음원을 들으니 더 생생하게 장면들이 기억났다. 땀냄새나는 연습실이, 팽팽하게 긴장된 무대 옆 대기실이 그리웠다.
도서관에 있다가 아이들 학교에서 온 이메일을 받았다. 2022년 가을부터 2023년 여름까지를 평가한 성적표였다. 아이 별로 각각 세장씩이었다. 첫 페이지에는 분류와 용어 설명이, 다른 페이지에는 선생님의 총평과 영어, 읽기, 쓰기, 수학, 과학으로 나누어진 평가, 학기별로 나누어진 평가들이 있었다. 영어로 쓰인 성적표를 읽어 내려가며 주옥같은 표현이 나올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밑줄을 쳤다.
tremendous progress 엄청난 발전
his comprehension grows 그의 이해력이 커집니다.
enthusiastic member of the class 수업의 열정적인 구성원
quickly established 빠르게 자리 잡음
motivated learner 의욕적인 학습자
become more comfortable 더 편안해집니다.
his confidence shines 그의 자신감이 빛납니다.
absolute pleasure to teach 가르치는 최고의 기쁨
내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동안의 수고를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자식 키우는 기쁨이 이런 것이구나. 가족들에게 카톡으로 실컷 자랑을 늘어놨다. 시차 탓인지 부모님은 답이 없으시다. 감동을 나누고 싶어 벅찬 마음으로 남편에게도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이 왔다. "회의". 어휴, 내가 이렇게 건조한 남자랑 산다.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도 극작가가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은 그 경험 때문이었다. 강렬한 딱 한 번의 경험. 내가 쓴 글이 무대에 올랐던 대학 졸업 공연. 내가 상상한 인물이 무대에 살아 움직였던 그들의 목소리를 가졌던 짜릿한 순간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지금은 왜 쓰지 않냐고 물었다. 잘 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라는 대답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자기도 자기보다 잘 쓰는 사람이 많지만 '그냥 쓴다'라고 했다. 사실 무언가를 하는데 필요한 건 끈기, 계속하는 것일 것이다. 영어도 운동도 글쓰기도.
유학을 오기 위한 분명한 목표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온 단순한 삶이 좋았다. 어쩌면 무모하게 아무 연고도 없는 런던으로 왔지만 나 혼자만의 성장이 아닌, 가족 모두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아이들의 눈부신 성장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어 기뻤다. 나도 공부하면서 함께 자랄 수 있어서 좋았다. 엄마의 시간은 아이들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