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포머의 담대함을 흉내 내다
한 여자가 바닥까지 늘어지는 긴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한쪽으로 성글게 땋아 늘어뜨린 채 의자에 앉아 있다. 여자의 이름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Marina Abramovic. 전라는 물론 죽음을 넘나드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화제를 모아 온 예술가이다. 2010년 뉴욕 모마에서 열린 The Artist is Present에서 그녀는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그녀 앞 빈자리에 앉는 사람과 서로를 응시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다.
멋지게 수염을 기르고 검은색 정장에 컨버스를 신은 한 남자가 그녀 앞에 앉는다. 여자의 눈빛이 흔들리며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마주 잡는다. 말을 하거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퍼포먼스의 룰을 깬 것이다. 그는 그녀의 오랜 연인이자 함께 작업해 온 울레이(Frank Uwe Laysiepen)였다. 그의 깜짝 등장에 그녀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 헤어진 연인과의 재회. 나는 그 영상에서 그녀의 아주 인간적인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5분. 겨우 5분이었다. 무심코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이지만, 어느 때는 아주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2023년 초 시작한 두 번째 학기를 마치며 퍼포먼스를 발표했다. 그동안 접했던 공연예술 이론과 관심 있는 연구 주제를 말도 글도 아닌 ‘퍼포먼스로’ 보여주어야 했다. 그것도 오십여 명의 관객 앞에서.
무대 뒤에서 일해왔고 공연을 보는 데는 익숙하지만 무대에 서 본 적은 까마득했다. 프레젠테이션이나 회의 진행해 본 것이 다였다. 고요한 공간에서 혼자 움직인다는 게 수많은 시선 속에 뭔가를 한다는 게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가.
수업 중에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퍼포먼스의 사례들을 많이 접하게 됐다. 그중에서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의 몸을 매개로 예술가와 관객 사이의 관계를 실험해 보는 다양한 퍼포먼스를 시도했다. 여러 책에 반복해서 언급되는 그녀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공연의 현장성, 그 현장성을 기록할 수 있는지, 아카이브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공연은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내내 고민했다. 퍼포먼스가 사라지는지, 지속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아브라모비치의 2010년 MoMA전시 중 The Artist is present라는 작품은 예전 퍼포먼스를 재연한다는 점과 그것을 영상으로 기록하면서 라이브 스트리밍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은 아브라모비치와 울레이가 시도했던 Nightsea Crossing(1981-1987)의 다른 버전이다. 이들은 먹지도 말하지도, 움직임 없이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갑자기 살이 너무 빠져 갈비뼈가 장기를 눌러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울레이의 자리를 비워둔 채, 그녀는 퍼포먼스를 이어갔다.
나는 그 퍼포먼스를 재연함으로써 2010년도 화제의 무대에 있었던 그녀를 불러오기로 했다. 나로 하여금 그녀를 떠올리도록 함으로써 나의 질문들과 그녀가 던졌던 수많은 질문들이 함께 떠오르도록 했다. 그녀가 오랜 시간 몰두 했던 거의 고행에 가까운 공연. 시간에 대한 생각들. 거기에 내가 느껴온 언어의 장벽에 대한 이야기를 보탰다.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언어가 없이도 그저 마주 봄으로써 우리는 소통할 수 있다. 스마트폰 화면이나 모니터가 아니라, 우리는 서로 직접 눈을 맞추고 함께 호흡할 수 있다. 공연의 라이브니스는 거기에 있다.
목정원 작가는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아침달, 2021)이라는 책에서 2013년 연출가 제롬 벨이 <교황청>이라는 연극에서 일반 관객을 무대에 올렸던 이야기를 다룬다. 은퇴한 70세 자클린 미쿠의 이야기가 인상 깊다. 어린 시절 아비뇽에 연극을 보러 가는 것이 관례가 되었던 일, 부서지기 쉬운 소녀 <안티고네>를 만난 일, 안티고네가 자신의 삶에 들어온 것을 깨달은 일, 그리고 생을 지속해갈 힘을 되찾기 위해 날마다 안티고네에게 이야기했다고 그녀는 털어놓는다.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우리들 본성에 기인한 어려움을 맞닥뜨릴 때마다 저는 그의 냉정함과 의연함을 빌려 썼어요. 제 힘을 넘어서는 생의 시련이 닥칠 때마다 저는 그녀에게도 되돌아가요. 제 보통의 삶으로는, 제 보통의 삶으로는, 그녀의 존재 없이는 그 최후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할 거예요.
나 역시도 자신의 몸을 매개로 인내심의 극한을 실험하고, 목숨을 걸고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아브라모비치의 담대함을 빌어 잠깐이나마 용감해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칠판에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이름과 전시 장소, 날짜, 제목을 썼다가 그 위에 다시 오늘 공연 장소와 날짜, 내 이름을 썼다. 연습때와는 달리 글씨를 쓰다가 스펠링을 틀려서 당황했지만 계속 썼다. 그리고 미리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처음 한참 동안은 아무도 내 앞 빈자리에 앉지 않았다. 이렇게 5분이 다 흘러가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저 앞에 내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던 중국 친구가 자기 친구에게 나가서 앉으라고 쿡쿡 찌르는 것이 보였다. 그날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이었던 그 친구는 자리에 앉더니 나에게 '하이'하고 인사를 했다. 나도 순간적으로 인사를 할 뻔했다. 멀리 사람들 너머 와인 병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평정을 찾으려 했다. 수업 중에 시연할 때는 그렇게 심장이 쿵쾅거리더니, 공연에서는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앞에 앉은 관객은 언제 일어나야 할지를 몰라 한참을 앉아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어색하게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친구가 일어났고, 다른 수업 교수님이 앞자리에 잠시 앉았다가 갔다. 박사과정 학생들도 나와 시선을 마주쳤고 잠깐을 공유했다.
각자의 방식대로 퍼포먼스를 마치고서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서로를 칭찬했다. 너 멋졌어, 우리가 해냈어하며 인사를 나눴다. 학기 초에 내 옆자리를 피해 다른 자리에 앉아서 내 맘을 상하게 했던 그 미국 아이와도 끌어안고 한참 서로를 다독였다.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