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님을 처음 만났을 때 조용하고 차분한 첫인상에 무대 위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 않았어요. 인터뷰에 실을 사진을 받아보니 마술사로서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열린 님을 만난 가을날 유난히 날씨가 좋았습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커피가 식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따뜻함과 마술사로서의 매력이 인터뷰를 통해 잘 보여지기를 기대합니다.
✓ 자신을 소개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술사 이열린입니다.
한글 이름이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살라는 뜻입니다. 요즘은 고집만 많이 생겨 그러지 못하고 있어 미안한 이름입니다.
2022년 웨스트엔드에서 Wonderville, West End Magic Show 등에 출연했고, 2023년 태양의 서커스 그룹에서 기획한 유럽 최대 투어 마술공연 C’est La Magie팀에 합류해서 프라하, 부다페스트에서 공연했습니다.
영국 International Brotherhoods of Magicians(IBM)에서 3관왕, 프랑스 파리 L’héritier de I’illusion에서 2관왕, 스페인 National Valladolid 대회 2등, 스페인 Almussafes 대회 1등, 영국 2024 Stage Magician of the Year로 선정되는 등 총 6개 국가에서 9개의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202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Collage라는 마술 공연을 올려 4 star review를 받았고, 현재는 Waterloo에 위치한 Rhythm&Ruse라는 이머시브 극장(Immersive Theatre)및 다양한 곳에서 공연하고 있습니다.
✓ 자신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있나요?
한국어로는 보통 ‘런던의 한국인 마술사’ 정도를 소개하고, 영국에서는 매니퓰레이터(Manipulator), 인터내셔널 챔피언 마술사(International Champion Magician), 일루셔니스트(Illusionist)로 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매니퓰레이터는 특정한 시스템 및 장비가 아닌 손기술을 주로 사용하는 마술분야를 뜻합니다. 세계마술대회(FISM)에서 한국인이 꼭 한 명 이상 수상 할 정도로 한국 마술사들이 가장 잘하는 분야 중 하나입니다.
✓ 자신의 강점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남들이 말하는 길이 아닌 저만의 시장을 개척해 나가고 있는 것이 강점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마술 행사를 하거나 대회를 준비해서 해외에 출장을 가는 것이 마치 불변의 법칙처럼 알려져 있었으나, 해외 중 특히 유럽시장에 직접 뛰어들어 커리어를 쌓고 있는 건 제가 처음입니다.
개인적인 장점은 적응력이라 생각합니다. 낯선 환경에 던져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스트레스받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샌가 제 자아 깊숙한 것까지 적응해 간 저를 발견합니다. 직업적인 특성도 있겠지만, 어느 집단에 들어가면 그들을 대하는 제 몸짓, 언어, 성격, 가치관까지 옷 입듯 바꿀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저를 숨기고 가면을 쓰고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 런던에 온 지 얼마나 됐나요? 어쩌다, 무엇 때문에 영국에 오게 됐나요? 왜 하필 영국 런던이었을까요?
현재 딱 2년 반 됐습니다. 2022년 5월 영국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처음 들어왔습니다.
10살 때 마술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배워본 적도 없어서 고등학교 때 그만두고 대학에 가고 군대에 갔습니다. 학교는 현재 본업과 전혀 관련이 없는 국민대학교 경영정보학과를 나왔습니다. 군대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다가 전역 후 마술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21살 때 마술학원에 등록했습니다.
그때 만난 제 첫 멘토와 함께 회사를 공동으로 창업했고, 휴학 후 1년간 인천에서 행사를 뛰었었습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과 제가 원하지 않는 많은 일을 해야 하는 현실에 부딪혀 회사를 나왔습니다. 복학하며 마술을 그만두려 마음먹을 때쯤 부모님께서 외국 마술사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아보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2019년에 프랑스 파리로 교환학생을 갔습니다. 교환학생 도중 버스킹도 시도해 보고 프랑스 마술사들을 만나 얘기도 나눠봤습니다. 그때 우연히 런던에 놀러 왔고, 웨스트엔드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1년 365일 엄청난 뮤지컬과 공연들을 하는 웨스트엔드의 극장들이 저에겐 상당히 충격적이더라고요. 특히 당시에 세계 최대 규모 마술공연 The Illusionists 포스터가 Shaftesbury Theatre에 걸려있는 것을 보고, 마술사로서 다시 이곳에 오겠노라 마음먹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코로나가 저에겐 기회였습니다. 2년간 낮에는 일하며 돈을 모으고 밤에는 정릉에서 서울대입구 왕복 2시간 반을 왔다 갔다 하며 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 시간이 없이 무작정 영국에 왔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하다가 한국에 돌아갔을 것 같습니다.
✓ 영국에 와서 달라진 점이 있나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생각나는 것들만 정리해 보면 아래처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사람들과 아이 컨텍을 많이 한다.
- 표정이 다양해졌다.
- 새로운 걸 하는 것을 예전만큼 두려워하진 않게 됐다.
- 철저한 계획보다 즉흥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많아졌다.
-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줄었다.
- 완벽하지 않아도 되고,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 한국에 있을 때보다 건강이 나빠졌다
전체적으로 인생과 사람에 대한 긴장감과 기대를 많이 내려놓고, 많은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날카로웠던 자아가 이리저리 마모되면서 부드러워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영국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을 때는 언제였나요?
일할 땐 한국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대회수상, 투어공연 등을 이루어 냈을 때, 혹은 공연 끝나고 관객들을 만나 좋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영국에 오길 잘했다 생각이 듭니다. 특히 영상으로만 보던 월드클래스 마술사들과 함께 일하고 얘기 나눌 수 있는 것이 큰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되돌아보면 거창한 일을 했을 때보다 여유롭게 커피 혹은 맥주 한잔 하거나, 공원을 열심히 뛰고 노을 바라볼 때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행복과 뿌듯함을 꼭 거창한 곳에서만 찾으려고 하진 않으려 노력합니다.
✓ 분명 힘든 날도 있었을 텐데, 영국에 와서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어요?
저는 특히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크게 힘들었습니다. 저는 2년 반 동안 오직 프리랜서로만 생활비를 벌어왔습니다. 처음엔 인보이스 작성하는 법도, 공연일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마술사들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프리랜서로만 일을 하다 보니 돈이 제대로 입금되지 않을 때가 비일비재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초반엔 감정적으로 대응했다가 역으로 고소를 당할 뻔도 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예방할지,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기면 어디에 신고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최대한 감정적인 부분을 다치지 않으려 애쓰는 중입니다.
✓ 영국에 오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미리 와본 사람으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저는 현실적인 사람이라 조금 현실적으로 접근해서 말해주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회사생활을 다양하게 해서 스펙이 정말 좋으시거나, 남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자기만의 능력 혹은 분야가 있다, 영어를 정말 잘한다, 혹은 경제적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분이라면 영국으로 오시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위 요소 중 하나라도 해당되지 않는다면 특히 런던에 오는 것은 극구 반대합니다. 주위 해외 한인들에게 많은 얘기를 듣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현재의 영국, 그중 런던의 삶의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렵습니다. 기회가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 기회를 잡으려고 전 세계에 날고 기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정말이지 운이 좋아 마술이라는 분야로 글로벌텔런트비자도 받고 생활을 해 오고 있지만, 다시 시도할 수 있겠냐 물으면 절대 못할 것 같습니다. 굳이 영국 런던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질문하고 고민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엔 굳이 겪지 않아도 되는 고생도 있다 생각합니다.
✓ 당신의 인생 공연은 무엇인가요? 추천하고 싶은 공연이 있다면요?
마술 공연 중에선 영국의 유명 마술사인 데런 브라운(Derren Brown)의 Showman, 그리고 Harry Potter and the cursed child 가 가장 좋았습니다. 데런 브라운은 멘탈리스트라 해서 심리마술을 하는 사람입니다만, Showman 공연에서는 심리뿐 아니라 최면, 스토리, 구성, 감동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진정한 쇼맨, 데런 브라운은 마인드 컨트롤과 심리적 환상의 대가입니다. 쇼맨은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인터랙티브 쇼입니다.
✓ 요즘 가장 몰입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새로운 마술을 창작하는 일입니다. 항상 주어진 것을 잘하는 저에게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자 과제였습니다. 실패하는 것을 꽤나 두려워하고,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남에게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했었습니다. 그러나 실수나 실패 없이 좋은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크게 느꼈고, 요즘은 새로운 마술을 과감하게 시도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과 제 생각에 더욱더 솔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1월에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제 개인 공연을 올리게 되어, 새로운 공연을 만들고 있습니다. 극장이 아니라 많은 것을 시도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기존에 하지 않았던 작은 무언가라도 해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언가에 몰두한다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어요? 이루고자 하는 꿈이 무엇인가요?
부끄럽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월드클래스 마술사가 되고 싶습니다. 전 세계에서 투어 다니며 제 공연을 하고,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저를 알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마술을 평생 그만두지 않고 가까이 두며 살고 싶습니다.
제 마술공연을 기획하는 것은 물론, 다른 공연의 마술 컨설팅으로 들어가서 일해보고 싶습니다. 해리포터 연극의 마술효과처럼 단순히 마술공연이 아닌 뮤지컬, 연극, 전시 등 다양한 분야에 마술을 활용해 보고 싶습니다.
모두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대단한 일을 해내지 않아도,
큰 도전을 하지 않아도,
대단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인생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인만의 외로운 길을 가고 계시다면
진심으로 응원하고,
그렇지 않아도
행복한 삶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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