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잼 매니저 Apr 06. 2020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첫사랑. 이 달콤 씁쓸하고 어리숙한 단어는 나에게 그날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녀와 한강 공원에 나란히 앉아 설렘과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잔잔한 강을 바라보던 6월 6일의 현충일을. 고3 새 학기가 시작되고 잠이 온다는 핑계로 교실 뒤로 나가 수업시간 내내 그녀를 훔쳐보던 시간을 지나, 온갖 핑계를 대며 그녀와 밖에서 만날 약속을 만들어내던 시간을 지나, 두 번의 거절도 막을 수 없던 나의 마음을 끝내 그녀가 받아주었던 그날을. 그녀는 내가 바라던 이상형처럼 예쁘지도, 키가 크지도, 도발적이지도, 시원시원하지도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귀엽고, 작고, 내성적이고 답답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고, 그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마음이 단순한 호감을 넘어선 사랑이라는 것을 확신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슴이 아려오는 경험을 했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범위가 끝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깨달았으니까. 그러나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던 내 마음은 상황과 함께 변해갔다. 나와 그녀가 낯설고, 버텨내야만 하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 겪어보지 못한 서로 다른 환경을 이해와 공감으로 극복해 나가며 만남을 이어가기엔, 20살의 우리는 너무 어렸다. 같은 이유로 몇 번의 다툼이 있은 후 우리의 관계는 끝내 종점에 다다랐다.


 뜻하지 않게 1년 내내 앓고 있던 첫사랑을 잊게 해 준 사람을 만났다. 오랫동안 좋아한 연예인처럼 매력이 풀풀 풍기던 그녀는 ‘사람은 사람으로 잊어야 한다.’는 말이 내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몸소 알려주었다. 그녀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나는 첫사랑이 아닌 그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꿈꾸던 이상형처럼 고혹적이면서 아름다웠고, 그녀를 안았을 때 얼굴 어디에도 입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키가 컸고, C컵인 자신을 만났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라고 할 만큼 도발적이었으며, 단 한 번도 답답함을 느낀 적이 없을 정도로 시원시원했다.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내게 많은 것을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균형이라도 맞추려는 듯, 그럴수록 나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바라고 요구하게 되었다. 말을 하지 않고도 알아주길 바랐고, 무조건적으로 나를 기다려주길 요구했다. 그 어리석은 이기심이 다시없을 인연의 실을 급하게 잘라냈다.


 또 다른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대체 어떻게 내가 이렇게 예쁜 여자를 만나고 있는 걸까’란 생각이 종종 들 정도로 예뻤던 그녀를. 그녀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 한 뚜렷한 특징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통해 내가 살아가는 삶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매 약속마다 꼭 30분에서 1시간씩 늦었고, 늦는다는 언질도 전혀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하지도 못했다. 그 당시의 나는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에게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물었다. 말문이 턱 막히는, 상상도 못 한 답이 돌아왔다. “아무도 나에게 늦는 것 가지고 너처럼 뭐라 하지 않아.” 나의 혼란스러움을 듣던 친구는 나에게 공감을 해주는가 싶더니 그녀의 사진을 보고는 “얘는 충분히 그래도 될 것 같은데?”라며 내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관념을 깨버렸다. 예쁜 여자가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게 해 준 그녀는 의외로 생각과 고민이 많았다. 우리는 얕고 깊은 여러 주제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 유익한 즐거움 속에서 서로를 알아가며 사랑의 농도는 진해져 갔다. 그리고 그것이 내면 깊숙한 곳에 다다랐을 때, 독이 됐다. 그녀가 생에 처음으로 털어놓았던 가감 없는 깊은 내면에서 나는 모순을 느꼈고, 그것은 곧 이질감으로 변해갔다. 불행히도 그때의 나는 그녀 내면의 모순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게도 같은 모순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연인이 내게서 눈물을 자아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여성. 처음 그녀를 내 눈에 담았을 때, 나는 그녀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존재하는 그 누구보다. 무뚝뚝함이 느껴지는 단호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그녀에게 쥐어주었던 한획 한획 정성스레 눌러쓴 나의 마음과 번호가 적힌 쪽지가 ‘쪽지 잘 받았어.’라는 답장으로 3일 만에 돌아왔을 땐 가슴이 벅차올라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다음 날부터 예정된 3주간의 토익 캠프를 뒤로 하고 당장이라도 그녀가 있는 포항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정도로. 그 얘기를 듣고 그녀는 차분하게 ‘그럼 토익 캠프 끝나고 보자.’라고 말해주었다.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영어 공부만 해야 하는 3주간의 영어 수업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모든 수업이 끝난 뒤 그녀와 나누는 짧은 대화는 매우 흥분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알아갔고, 나는 그녀에게 점점 더 빠져 들어갔다. 캠프가 끝나고 포항으로 내려가 만난 그녀는 통화할 때와는 다르게 수줍어했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착하고, 더 예뻤다. 포항에서의 짧은 만남과 서울에서의 몇 번의 만남 후에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연인이 돼서도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은 한계가 없는 것처럼 커져갔다. 그러나 그 사랑도 시간이 지나고 몸에 무리가 올 정도로 바빠지기 시작하자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졸업을 앞둔 나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를 정도로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 당시 내 머릿속에는 ‘쉬고 싶다.’는 생각 외에 그 어떠한 것도 들어올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나 사랑했던 그녀조차도. 그렇게 비교적 여유가 있었던 그녀는, 내가 변했다며 나를 떠나갔다.


-


 처음으로 사랑했던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다른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를 잊게 해 준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 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사랑이 누군가의 특징이 아닌, 누군가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얼굴, 몸매, 성격, 취향 같은 특징은 시간이 가면 변해갈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보고 만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사랑이란 내가 이상형과는 반대의 첫사랑을 사랑했던 것과 같은,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잘 모르겠다. 몇 번의 사랑과 이별을 하고 나니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정말 그 존재를 사랑했던 걸까? 그 상황과 환경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다른 존재가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그 다른 존재를 사랑하게 되지 않았을까?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확신할 수 있는 단 하나는, 그때의 나는 오직 마음 하나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고, 지금의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여러 조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돼버렸다.


 마음만으로 사랑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지금. 너무 많은 것을 경험하고 알아버린 지금. 나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소니 녹음기 UX570F 일본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