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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 매니저 Apr 14. 2020

나는 매일 사람을 죽인다


 나는 밖에 나갈 때면 하루에도 몇 번씩 —어쩔 때는 수십 번씩— 살인을 저지른다.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매일 밖에 나가기 때문에 이것을 하루 일과 중 필수적인 하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묻지마 살인처럼 기준이나 절차도 없이 아무나 막 죽이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나름의 선별 기준과 상황에 따른 절차가 있고, 항상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선별 기준은 그렇게 까다롭지 않다. 내가 정해 놓은 조건 3가지를 충족하기만 하면 선별 기준에 맞는 ‘대상’이 된다. 그 조건 3가지는 다음과 같다.


1번 조건: 남에게 —특히 나에게— 무분별하게 피해를 끼치는 사람.


2번 조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함을 전-혀 모르는 사람.


3번 조건: 심지어 내 마음에 들지도 않는 사람.


 세 가지 조건들에 대해 설명을 조금 덧붙여보자면, 어떤 사람이 1번, 2번 조건에 부합하는 ‘대상’인가 하는 판단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그 기준이 불명확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불명확하게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무분별한 피해’의 경우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르고, ‘미안함을 모름’ 같은 경우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은 이상 타인이 알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비언어적 표현인 ‘표정’을 통해 메시지를 읽어내고, 이를 판단 근거로 삼는다. 눈빛, 입 언저리 혹은 눈썹의 미세한 떨림 등을 통해 ‘대상’ 주위의 사람들이 피해를 받고 있는지, ‘대상’이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등을 비교적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이것으로 완벽한 객관성을 갖춘 명확한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대상’을 특정하는 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판단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여전히 많은 부분을 감과 비언어적 표현에 의지하니까 말이다.


 3번은 아주 제멋대로인 조건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3번 조건은 1번과 2번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특히 요즘에는 더욱— ‘대상’을 처리하는데 소요되는 시간과 에너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추가적으로 만든 조건일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상’은 날이 갈수록 더욱 늘어나고 있다. 또 하나의 조건을 추가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될 정도로 말이다. 대체 어디에서 ‘대상’들이 끝도 없이 솟아나는 건지, 나로서는 크나큰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조건에 맞는 ‘대상’을 처리하는 것을 ‘작업’이라고 하는데, 이는 ‘대상’을 선별하는 것보다 조금 더 복잡한 절차를 따른다. ‘대상’을 포함해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내가 혼자 있을 때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를 구분하고, 그다음에 추가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일을 진행하게 된다.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혼자 있을 때의 ‘작업’이 훨씬 수월하다.


 먼저 혼자 있을 때,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대상’이 나타나면 곧바로 ‘작업’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곧장 ‘대상’의 얼굴을 확인하고, 노려본다. 이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상대가 내가 노려본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 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아, 당연히 노려보는 것은 ‘작업’을 위해 꼭 필요한 절차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 부분은 ‘작업’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코스인데, 이 행위로 얻는 쾌감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나의 적의를 ‘대상’이 눈치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주는 떨림과 흥분이란! 특히, 살벌한 살의를 담은 시선을 ‘대상’이 알아채기 직전에 거두어드릴 때 느껴지는 짜릿함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신음이 나오게 만든다. 하앙-.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통과의례를 끝낸 뒤에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때 ‘이동의 여부’가 ‘작업’의 방식을 정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대상’이나 내가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라면 비교적 시간이 적게 걸리는 방법을, 둘 모두 이동하지 않고 있다면 일반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평소 내가 즐겨하는 작업 방식은 다음과 같다.


 • 일반적인 경우: 대상을 어딘가에 묶어놓고 일단 두들겨 팬다. 그러다가 깔끔하게 땅에 묻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경우: 까마득한 절벽 혹은 건물 위에서 밀어버린다.


 •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거나 내가 아주 예민한 상태인 경우: 온갖 기구를 사용하여 고통을 준 뒤 잔인하게 처리한다. (피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피를 보지 않아도 되는 족쇄, 밧줄, 펜 같은 기구를 주로 사용한다.)


 작업에 소요되는 시간은 일반적인 경우 5분에서 10분 정도이고,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경우는 몇 초 걸리지 않는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거나 내가 아주 예민한 상태인 경우에는 내 기분이 풀리거나, 시간 관계 상 어쩔 수 없이 끝내야만 하는 상황이 오기 전까지 계속해서 ‘작업’한다.


 다른 누군가와 있을 때는 혼자 있을 때보다 조금 더 면밀하게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내가 어떤 대상과 있는지, 내가 그 대상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인지, 소수 혹은 다수와 함께 있는지 등의 변수가 ‘작업’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작업’에 방해를 받거나 나와 같이 있는 지인이 내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는 것은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기 때문에 ‘작업’에 필요한 여유를 확보할 수 있는지가 최대 관건이 된다. ‘대상’이 선정되고 ‘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 여유가 확보된 상태라면 그 뒤의 절차는 혼자 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여유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보통은 머릿속 리스트에 기록해두었다가 혼자서 ‘대상’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작업’하게 된다.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가끔은 —조건을 충족하지 않은 사람을 ‘작업’하는 것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죄의식에 며칠씩 ‘작업’이 중단되기도 한다. 실수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수치감에 휩싸이고, 어설프고 서툰 나의 판단능력을 자책한다. 그러나 이는 곧 실수를 만회하고자 하는 의지가 되고, 그 의지는 열정과 에너지로 탈바꿈하여 결국에는 보다 많은 ‘대상’을 ‘작업’해야겠다는 사명감이 된다. 사명감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핸드폰도 들여다보지 않고 조건에 맞는 ‘대상’을 물색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평소와 같은 상태가 되고, 곧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지만 말이다.


 아주 가끔이지만, 술에 취해 비틀비틀하면서도 ‘대상’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거나, ‘작업’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깨달음이 문득 찾아올 때면 철학적이고 회의적인 의문들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과연 이 행위에 의미가 있을까?’, ‘이게 나를 망치고 있는 건 아닐까?’ 보통은 시간이 해결해주지만,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이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이럴 때는 오직 믿음만이 나를 구원해줄 수 있다. 의심하지 않고 믿어야만 한다. 내가 ‘대상’ 하나를 ‘작업’할 때마다 세상은 전 보다 더 나아졌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이런 노력이야말로 올바른 시민의 신성한 의무이자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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