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차 - 문제는 계속 된다.
눈을 떴다. 9시간에 달하는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몸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마 오랜만에 기분 좋은 저녁을 보내고 돌아와 편안하게 잠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른한 몸을 일으켜 하늘을 향해 손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잠들어 있던 감각들을 깨우며 날씨를 확인하는데 웬걸, 일주일 내내 비 예보가 있었다. 화창하고 평화로웠던 어제의 날씨를 회상하며 몇 분간 멍하니 비 예보로 뒤덮인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새로 고침을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커튼 사이로 창밖을 바라봤다. 예보와 다르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빗줄기가 굵지 않았다. 이에 감사함을 느끼며 순례자의 길에 오를 준비를 하였다.
준비를 마치고 잠시 다시 침대에 앉았다. 다음 도시 ‘Coimbra'에 가기 위한 방법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나에게는 다음 도시로 가기 위한 방법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 구글 지도를 이용해서 간다.
둘째, 노란 화살표를 따라서 간다.
셋째, 포르투갈 산티아고 책자를 보고 간다.
매일 상황에 따라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방법을 섞어가며 다음 도시로 이동하지만, 기본적으로 주된 방법을 하나 정해놓고 가야 길을 찾기 편하기 때문에 셋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에 책자는 가방 속에 넣어 놓고 구글 지도를 기본으로 하여 노란 화살표로 잘 가고 있는지 확인키로 했다. 구글 지도로 'Coimbra'까지 가는 길을 따라 올라 가보니 최단거리는 고속도로를 꼭 지나게끔 되어있었다. 식은땀을 비처럼 줄줄 흘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조금 힘들더라도 좀 돌아서 가는 길을 찾아 어림해봤다. 지도에 나있는 길을 대충 손가락으로 타고 올라가 'Coimbra'에 올려놓고선 '고작 한 도시쯤이야. 뭐, 빨리 도착하겠네. 어제는 두 개 도시를 지나왔는데.'라고 자만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나서자 방금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벤도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피로가 가시지 않았는지 느지막이 출발할 것이라고 했고 혹시 다음 도시에서 볼 수 있으면 보자고 했다. 나는 꼭 다시 길 위에서 보자고 그에게 답했다. 짤막한 대화의 끝은 역시 순례자들만의 인사였다.
“부엔 까미노”
나는 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비가 흩날리는 길에 들어섰다. 도시를 벗어나 어림해놨던 길을 가는데 셀 수 없이 많은 산과 오르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을 부정하며 정말 이 길이 맞는지 보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지도를 확인해보면 힘든 이 길이 내가 가야만 하는 길이 맞았다. 정말, 정말, 정말 지치는 길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산속 작은 샛길까지 구글 지도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그리고 거의 정확하게 나의 위치를 알려주었기 때문에) 어림해놨던 길로 갈 수 있었다.
설상가상, 얼마 전부터 불안했던 킥보드 앞바퀴가 뭐에 걸린 듯 잘 돌아가지 않았다. 바퀴에서 뭔가 걸린 듯이 뻑뻑한 느낌이 들면서 굴러가지 않았고 힘을 줘서 억지로 굴리면 뻑뻑하게 굴러가는 식이었다. 얼마 동안 억지로 뻑뻑한 바퀴를 굴리며 가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되어 잠시 자리에 앉아 킥보드를 살펴보았다. 킥보드를 살 때 들어있었던 육각 렌치로 여기저기 조이고 풀며 다양한 시도를 해봤지만 바퀴 안의 부품 고장이 원인인지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부슬대는 비를 맞으며 나는 진지하게 킥보드를 버려야 하나 고민했다. 언제까지고 이런 상태의 킥보드를 끌고 갈 수는 없었다. 가만히 앉아 킥보드를 버리고 남은 길들을 걸어가는 나를 상상해보았다.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내 것에 대한 애착이 깊은 내가 지금까지 함께 한 킥보드를 여기 분리수거통에 버리고 간다는 것은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별다른 소득 없이 일단 이번 도시까지 끌고 가서 고치자는 마음으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빠각”
뻑뻑한 느낌의 바퀴를 억지로 힘을 줘서 굴리며 나아가고 있자니 어느 순간, 바퀴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크게 한 번 소리가 난 뒤로 바퀴가 심하게 양옆으로 흔들리며 불안정하게 굴러갔다. 아무래도 결속 부품이 부러짐으로써 바퀴가 고정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쉬지 않고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오르막길을 오른 나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한 지 하루 만에 또 한 번의 고비를 맞이했다. 그래서 ‘Coimbra'에 도착한다면 무조건 하루 더 머물 것을 다짐했고, 계속되는 고난의 오르막길을 지나 결국에는 포르투갈 왕국의 옛 수도이자 내가 이 나라에서 가장 사랑하게 될 도시에 도착했다. 휴식이 간절했던 나는 천혜의 요새 같은 도시에서 계단과 경사진 길을 오르고 올라 어렵사리 호스텔에 당도해 바로 2박을 결제해 버렸다. 도미토리로 들어가자마자 탈진 직전의 나는 모든 젖어있는 것들을 벗어던지고는 침대에 쓰러졌다. 눈을 감으며 오늘 저녁에는 고생한 나를 위해 꼭 초밥을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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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길을 걷지 않기로 마음먹은 아침의 도미토리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아침을 먹으러 가는 대신 다시 눈을 감고 어제의 저녁식사를 회상했다.
침대에 쓰러져 어둑해질 때쯤 눈이 떠진 나의 머릿속에는 ‘초밥’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미처 온전한 정신이 들기도 전에 핸드폰을 들어 초밥을 먹을 수 있는 일식당을 검색했다. 호스텔 2박 치에 달하는 부담스러운 가격을 제외하고는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발견했고 옷을 갖춰 입었다. 오랜만에 날 생선을 먹을 생각에 날아가듯 식당 앞에 도착하였다. 식당 문을 열고나서 나는 살짝 주춤했는데, 그 이유는 식당이 굉장히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진을 할까 후진을 할까 망설이고 있는 사이 직원이 다가왔고 나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검지를 펴서 혼자 왔다는 것을 알렸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나는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현재의 욕구,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 옆 자리 테이블에 올려진 음식 등을 종합해서 내린 나의 결론은 우동 한 그릇과 롤과 초밥이 조금씩 함께 나오는 메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두 가지 메뉴가 모습을 보였고 나는 '아차' 싶었다. 당연히 국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우동은 국물이 없는 볶음우동이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잘못된 선택에 대한 질책의 시간을 가진 뒤 능숙하게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집었다.
분명 초밥을 먹지 않았더라면 후회를 했겠지만, 먹고 난 다음날 아침에도 나는 후회하고 있었다.
다시 눈을 뜨고 앞으로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봤다. 가장 먼저, 킥보드를 고쳐야 했다. 한국어를 사용한 검색으로는 도저히 'Coimbra'에서 킥보드를 수리하는 방법에 대해 찾을 수 없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킥보드를 샀던 데카트론이 떠올랐다. 데카트론 정도의 대형 스포츠 매장이면 분명 AS센터가 있을 것이고 나는 수리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도에 가장 가까운 매장이라고 표시된 데카트론은 10km 거리에 있었다. 차가 있다면 모르지만, 수리에 대한 확신 없이 대중교통으로 다녀오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계속 방 안에서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일단 나가서 킥보드를 고칠 수 있는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앞바퀴가 덜렁거리는 킥보드를 가지고 길을 나섰다.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을 시작으로 골목골목 철물을 다루는 가게들에 무작정 들어가 덜렁이는 바퀴를 보여주며 고칠 수 있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기한 눈으로 나와 킥보드를 번갈아 바라본 뒤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 도시에서 갈 수 있는 곳은 모두 돌아다녀봤지만 헛수고였다. 별다른 소득 없이 호스텔로 돌아와 애증의 킥보드를 내려다보았다.
구입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된 킥보드는 1년은 줄기차게 사용한 것처럼 보였고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포기하고, 넘어지며 온 힘을 다해 걸었던 그 모든 길들을 함께한 킥보드가 멀쩡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내가 그렇게 무거워했던 배낭에 내 몸무게를 더한 100kg에 달하는 무게를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버텨왔던 것이다. 내가 걷고 있는 이 순례자의 길이 나에게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온 킥보드에게도 벅찼을 것이었다. 나만 생각했던 지금까지의 순간들을 반성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킥보드를 버리지 않고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
킥보드를 방에 두고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 다시 호스텔을 나섰다. 목적 없이 천천히 도시를 돌아다니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동양인 여행객이 적었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고 몇몇 가족 단위의 중국인 관광객만이 보였다. 조앤 K. 롤링이 영감을 받았다는 대학생들의 너풀거리는 망토가 종종 보였고 여느 포르투갈의 도시가 그렇듯 평화로웠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유명한 식당에서 줄을 서서 밥을 먹고, 분위기 좋은 바에서 와인 한 잔을 마시며 마치 여행자가 된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이 도시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행복했기 때문에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리라 다짐했다. 그때까지 내가 기억하는 이 모습 이대로 이 도시가 남아있기를 바라며 내일을 위해 침대에 들었다.
#알아두면 좋은 정보(tip)
- 포르투갈에서 초밥은 먹지 말자.
- 해리포터를 사랑한다면 Coimbra(코임브라)에 가보도록 하자. 행복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다.
- 포르투갈의 도시는 경사진 곳이 많고 도로에 돌들이 박혀있는 곳이 많다.
- 거리가 힘듦과 비례하지 않는다.
#오늘 걸은 길
- 출발: 08:35 / 도착: 15:00
- 거리: 약 30km
- 경비: 50.35 Euro